최상현 주필

 
눈은 순백의 겨울 꽃이다. 겨울 꽃인 눈은 허공에서 흰 꽃잎이 흩날리듯 내린다, 태양이 멀리 남쪽에 있는 때인 겨울엔 따뜻하거나 더운 바람인 남풍이나 동남풍 동풍은 불어오지 못한다. 대신 북쪽이나 북서쪽의 찬 기단이 눈을 싣고 온다.

바람이 조용할 때 눈은 나비 떼의 군무 춤을 추며 사뿐히 땅에 내려앉는다. 그럴 때 추운 겨울은 푸근하게 느껴지며 사람의 영혼에는 평화가 깃든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거친 세상 전체가 평화로워 보인다.

눈이 와도 그런 눈만 오면 좋겠지만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칠 때는 눈은 사나운 눈보라가 된다. 이 매섭고 사나운 풍설을 뚫고 사람은 나아가지 못한다. 풍설이 몰아칠 때 사람은 우주의 주인, 자연의 지배자라는 턱없는 오만을 잠시일망정 거두어들여야 한다. 인간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고 살기를 결판내는 전쟁도 매서운 칼바람과 사나운 눈보라 앞에서는 특유의 광기를 발휘할 수 없다.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우호조약을 깨고 도발한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독일군대는 스탈린그라드의 살인적인 한파와 폭설에 대부분 얼어 죽거나 굶어죽고 극히 일부만 살아 귀향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한국 특유의 모진 겨울 추위와 발이 푹 빠지는 적설은 미군에게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안겨주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미군은 중공의 대군이 꽁꽁 언 압록강을 몰래 건너와 평안도의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북진을 서둘렀다가 그들에게 포위됐었다. 그 포위망을 뚫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 원산으로 철수할 때 미 해병 2사단 병력을 가혹하게 괴롭힌 것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만이 아니라 월등한 무력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칼바람과 한파, 매서운 눈보라였다.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자연은 인간에게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인 신비한 두 얼굴을 가졌다. 자연의 위력 앞에 사람은 한없이 무력하지만 겸손하기보다는 오만하기 쉽다. 그 같은 자연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는 축복이라는 말을 담기도 어려운 생활에 대한 도전이며 두려움의 대상일 때가 많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어도 그들의 마음에서는 한파가 가시지 않는다. 눈이 오면 방은 차고 비가 오면 지붕이 샌다. 꼭 방이 냉골이 아니고 지붕이 비가 새지 않는다 해도 무역 규모 1조 달러인 지금 시대에 그들이 체감하는 상대적인 생활격차와 행복감의 괴리는 2백 년도 훨씬 지난 과거 정약용 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대 정부의 사회복지 시책과 관심도 그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부자들의 자선은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 달콤한 말에 끌려 표를 주어 당선시킨 선출직 권력자들과 그들을 따뜻이 부축해주어야 할 관료들은 약자를 돌보아야 할 섬세한 배려와 지도력을 발휘하기보다는 피터지게 싸우던 즐기던 권력을 가진 사람끼리의 특권적인 생활에 정신이 없다. 정략적인 포퓰리즘은 춤을 추지만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정약용은 정조 임금의 하교로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북부 지역을 돌면서 도탄에 빠진 민생과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시로 엮어 임금에게 고변했었다. 그것이 ‘교지를 받들고 고을을 순찰하면서 적성의 시골집에서 지음(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이라는 시다. 이 시는 가슴 미어지는 내용으로 일관된 참담한 민생현장에 대한 묘사다. 사실에 충실한 기술이지만 임금의 선정을 칭송하는 구절은 한 마디도 없다. 그 정직한 우직함이 임금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총선을 앞둔 정치 마당이 김시습이 말한 ‘작서(雀鼠)의 뜰’과 같다. 뿐만 아니라 온갖 사회적 소통의 수단과 통로에 ‘작서의 뜰’에서와 같이 참새나 쥐의 찧고 까부는 짹짹거림이 가득하다. 높이 나는 대붕(大鵬)은 잡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작서의 뜰’은 갈수록 더 시끄럽고 촐싹거리는 참새나 쥐들의 낙원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이 같으므로 정직하고 우직하며 출중한 애민(愛民)의 실학자 정약용과 같은 대붕의 동량지재(棟樑之材)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정약용은 한 편의 시로 구중궁궐에 갇혀 민초들의 애환을 전혀 몰랐던 임금의 심금을 울리고 권력을 사유화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말거나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만 골몰하던 권문세도가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눈은 신비하다. 눈은 그 자체로도 신비하고 내리는 모습도 신비하며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 밟힐 때 나는 소리도 신비하다. 그런데 눈은 왜 오는가. 눈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은 눈이 만들어지는 자연현상에 관한 물리적 지식, 즉 피직스(Physics)의 극히 일부다. 그 물리적 지식의 베일 뒤에 숨은 형이상학과 섭리의 영역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에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머리 아프게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눈은 그냥 눈으로 보아 마냥 즐겁고 신비하다. 메타피직스를 몰라서 죽고 사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도 될 것이지만 메타피직스에 관심이 사라지는 사회는 점차 경박해지며 사람들은 그저 사망을 낳는 탐욕의 포로로 변해 간다. 그런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가 않다. ‘정치 혁신, 공천 혁명’이 정당들의 화두가 됐다. 결국 정치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바꾸고 인재를 구하는 것인데 제발 ‘작서’들이 찧고 까부는 ‘작서의 뜰’을 만들어 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눈을 볼 때 ‘피직스’에만 매달리지 말고 ‘메타피직스’도 생각하는 두터운 발상을 동원하라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