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이 17.4m에 이르는 쌍석불은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삼아 거기에 목과 머리, 갓 등을 조각한 바위를 얹어 만든 한 쌍의 부처상이다.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이 남상(男像), 오른쪽이 여상(女像)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자연 암벽 몸체로 삼아
머리ㆍ갓 올려 만들어

석불 제작시기엔 대해선
고려 vs 조선 의견 갈려

[천지일보=백지원 기자] 보물 제93호 용미리 석불입상을 만나러 가는 길.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석불을 찾아 장지산을 올랐다. 겨울이 한바탕 놀다간 자리엔 낙엽이 가득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남았다. 겨울 한복판에 서 있음이 새삼 느껴진다.

◆장지산에 자리한 남녀석불
높이 17.4m에 이르는 쌍석불은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삼아 거기에 목과 머리, 갓 등을 조각한 바위를 얹어 만든 한 쌍의 부처상이다. 구전에 따르면 하나는 남자상, 다른 하나는 여자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석불 가운데 남녀가 나란히 있는 경우는 드물어 더 의미 있는 석불이다.

가는 길에는 자그마한 사찰인 용암사의 대웅전, 범종, 석탑 등을 만날 수 있다. 사찰을 잠깐 둘러보고 쌍석불을 만나기 위해 옆으로 난 작은 돌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다다라 쌍석불을 올려다보니 그 크기에 압도된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직접 보니 그 위용과 크기는 매우 놀라웠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남상(男像)인 왼쪽 석불은 동그란 보관을, 여상(女像)인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갓을 쓰고 있다. 그리고 두 석불 모두 눈을 감은 듯도 하고 실눈을 뜬 듯도 한 모습이다.

눈, 코, 입 모두 크고, 무엇보다 귀가 매우 크다. 아마 여기에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서리라. 오른쪽 석불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손을 기준으로 위쪽과 아래쪽이 갈린 것으로 보아 위쪽 암석을 따로 올린 듯했다. 왼쪽 석불은 가지를 손에 쥐고 있다.

용미리 쌍석불은 인공적인 암석조각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몸체에 새겨진 옷주름, 손가락 등이 투박하면서 섬세한데, 깊게 깎거나 파내지 않았다. 위에 따로 얹은 얼굴과 목 석상은 깊고 뚜렷하게 조각된 반면, 자리에 있던 몸체 암석은 최대한 보존하려 한 모습이 눈에 띈다.

하늘과 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연과 사람이 함께 빚어낸 예술품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모습, 당시 사람들의 ‘예술의 깊이’에 감탄이 나온다.

▲ 석불 뒤편으로 올라가 본 석불의 모습은 두 개의 탑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사찰 입구뿐만 아니라 산 아래 마을이 막힘없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석불 뒤편에서 바라본 세상
산을 조금 더 올라 석불 뒤편으로 갔다. 그러자 여러 암석들과 함께 두 석불의 머리가 보인다. 마치 두 개의 석탑처럼 보이기도 한다. 머리 뒤쪽으로 가까이 가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사찰 입구뿐만 아니라 산 아래 마을이 막힘없이 훤히 다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논과 밭 그리고 수많은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고, 조그만 차들이 쉼없이 달린다. 이 쌍석불은 그렇게 이 세상을, 그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올려다 보는 석불이 아니라 석불과 같은 방향에서 세상을 보니 느낌이 새롭다.

이 석불이 제작시기에 대해선 고려시대라는 주장과 조선시대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선 불상의 앞면에 새겨진 명문을 근거로 제시한다. 조선 세조와 그의 부인 정희왕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자 탄생에 얽힌 전설
고려시대로 추정하는 데는 불상의 모습이 다른 고려시대의 불상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에 얽힌 전설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던 고려 13대 왕 선종은 원신궁주를 후궁으로 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도승이 궁주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에서 깬 궁주는 선종에게 이를 전했고, 선종은 사람을 보내 장지산으로 살펴보게 했다. 며칠 후 장지산을 둘러보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선종에게 “장지산 아래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있는데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말했다.

이에 선종은 이 두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그곳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궁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전설 때문에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故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해 이 대통령이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자가 석불을 살펴보는 동안 사람들이 이따금씩 들러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갔다. 부부도 있었고, 홀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쌍석불은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듣고 있었다. 인자한 표정과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로.

▲ 1954년 이 대통령이 용암사를 방문해 기념으로 세운 동자상과 7층석탑. 이 대통령의 어머니가 용미리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해 이 대통령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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