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탄자니아를 방문중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0일 자카야 키크웨테 탄자니아 대통령을 면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김영남 위원장이 자카야 키크웨테 탄자니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헌법상 ‘국가수반’… 실제로는 ‘얼굴마담’에 불과

[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언론이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만큼이나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영남(83)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다.

◆형식상 ‘서열 2위’ 김영남… 의전행사·친선외교 담당

그간 우리 언론뿐만 아니라 외신도 김영남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면서 그의 이름 앞에 ‘서열 2위’라는 호칭을 붙였다. 가령 ‘서열 2위 김영남 상임위원장, 김정일 건강 관련 발언’ ‘이명박 대통령, 북한 서열 2위 김영남 베이징서 만나’처럼 기사 제목을 뽑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부호가 붙는다. 과연, 알려진 대로 김영남이 북한 정권 내 실질적인 서열 2위에 해당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과거 국내의 북한 엘리트에 대한 분석은 세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주석단 서열과 권력서열을 동일시했고 김 총비서의 공식활동 수행 빈도와 파워 엘리트의 영향력이 정비례한다고 간주했다. 또한 당 우위 체제인 북한에서 당 엘리트보다 국가기구 엘리트를 더 중시하면서 권력서열을 오인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김영남이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했다. 이때 주석이 가지고 있던 ‘국가수반’이라는 지위 호칭을 뺀 ‘국가 대표 권한’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이양했다. 오해는 여기서 비롯됐다. 국가 중심 체제인 우리 시각으로 들여다보면서, 상임위원장을 북한을 대표하는 국가수반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한편 1998년에 개정된 북한 헌법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소환장을 접수한다(제111조 2문)”고 명시했다. 최근 개정 헌법(2009.4)에서도 여전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면서 국가원수라는 호칭 없이 외국사절에 대한 국제법상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히며 상임위원장의 ‘국가 대표권’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북한 헌법만 놓고 볼 때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지위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김 총비서가 맡고 있는 국방위원회의 위원장만 떼어놓고 보면 상임위원장이 서열 2위의 권한을 갖고 있다는 판단도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영남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형식적인 국가 대표권과 권한’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김영남은 주로 의전활동 및 친선외교를 담당하고 있다. 그가 김 총비서를 수행하는 명목은 각종 대회, 경축 공연, 기념식 등 연례행사에 국한된다. 군부대 시찰·경제활동 같이 중요한 현지지도와는 관련이 없는 게 특징이다. 실질적인 권력의 중추로 부상한 김정은, 강석주, 김영일, 김양건, 리영호, 장성택이 대중·대미·경제·군부 영역에서 활동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김 총비서가 직접 나서지 않는 국빈 영접 및 환송도 김영남이 도맡아 하고 있다. 헌법상 국가대표로서 외국 정상들과도 자주 만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친선외교의 영역에 한정된다. 지난 10일 김영남이 상대적으로 외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탄자니아의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과 면담을 진행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그는 ▲동맹국에 축전 및 위안전문 송달 ▲명예상·명예칭호·훈장 수여 ▲최고인민회의 회의 개최 시 연설 등을 주업무로 담당하고 있다.

◆김영남은 누구인가?

1928년생인 김영남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모스크바대학에서 외교학을 전공했다. 당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60년), 국제부장(72년) 등을 역임하며 외교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워왔다. 1974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75년 국제부문의 최고책임자인 당중앙위 비서에 진급했고, 1978년에는 당중앙위 정치국 위원이 됐다. 1998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등극했고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에는 당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임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장기간 상임위원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충성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956년 김일성이 권력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연안파의 도전(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김영남은 연설을 통해 연안파를 공격하고 김일성에게 특별한 신임을 얻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영남은 1967년 후계구도 문제로 숙청을 당한 갑산파를 제거하는 데에도 앞장서면서 김정일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82년 ‘김일성 훈장’을 받고, 1998년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영남에 대해 조사·발표한 황의정(박사과정) 씨는 “과거 형식상 서열 2위로 여겨졌던 김영남은 현재 대외적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만 최고 권력자 김정일과 그 후계자 김정은의 최측근 실세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한마디로 김영남은 실질적 국가수반인 김정일의 친선외교활동에 대한 대행자에 불과하며 결국 ‘얼굴마담’인 셈”이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김영남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당과 정 2개 이상의 지위를 겸직하고 있다”면서 “더욱이 장기간 쌓은 정통 외교 관료의 전문성·능력, 그리고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보인 헌신과 충성심만으로도 김영남은 파워엘리트 개념을 충족한다”고 설명했다.

# 본 기사는 이화여대 북한학협동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북한 통치엘리트 연구’ 수업(지도교수 정성장) 발표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 황의정 씨 발표자료 (2006, 2008년은 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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