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왕조 세조와 광해군은 임금 자리를 보위하기 위해 정의(正義)를 팽개친 왕이었다. 세조는 단종을 비호하는 세력을 다 주살하고 임금인 조카까지 귀양을 보낸 다음 시약을 보내 죽였다. 광해는 비록 친모는 아니지만 대비를 폐모하고 어린 이복동생을 불태워 죽였다. 두 임금의 잔인성은 인륜을 최고 가치로 여긴 조선사회의 이반으로 반정의 명문이 된다. 사육신은 세조를 축출하려다 실패했으나 인조반정은 광해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세조시기 권력은 그를 임금으로 옹립한 계유, 정난공신 세력이 차지해 국정을 농단했다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아비방연’이란 창극을 봤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호송을 책임진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극의 줄거리는 아비 왕방연이 사랑하는 딸 소사를 지키기 위해 한명회 편에 서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게 된다는 얘기다.단종을 지킨 충신 김종서를 축출한 계유정난에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까지의 궁중 암투와 권모술수를 시종 슬픈 우리 소리로 암울하게 펼쳐나간다.수양대군은 원로 공신과 충신들을 살육하면서 ‘적폐를 청산해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권력탈취의 정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난계 박연(蘭溪 朴堧)은 세종 당시 아악(雅樂)을 정리한 분이다. 76세 되는 해 계유정난으로 아들이 사형 될 때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세조는 나이가 많고 3조에 걸친 공신이라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난계의 고향은 충북영동 심천이었다. 그가 낙향하면서 청주목에서 하루 묵게 된다. 해가 기울자 난계는 피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처연하게 곡조를 탔다. 아들의 죽음과 어린 단종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을까. 구슬픈 피리소리에 몰려든 관아의 관리나 기생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수암 김동영천만리 머나만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애달프다.이 시조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 유배지 청룡포에 호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그의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청령포를 굽어보는 서강(西江) 강변 언덕에 앉아 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연군(戀君)의 단장곡(斷腸曲)이다.그는 참혹한 권력의 희생양이 되신 ‘단종’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절절이 표현하면서, 동시에 부도덕화한 정치권력으로부터 어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을 찾았다. 이화장은 1945년 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거주한 곳이다. 공사 중이라서 집 앞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만 보았다. 동상 아래에 새겨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새삼스럽다.원래 이화장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이었다. 그런데 1490년에 성종은 이 집을 사들여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탁영 김일손(1464∼1498)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