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오릉의 ‘홍릉’은 제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릉이다. 원래 영조는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묻히고자 허우제(무덤의 옆자리를 비워두는 방식)로 했으나 결국은 정순왕후와 함께 원릉에 묻혔다. 영조와 정성왕후는 왕과 왕비의 부부로서 33년이라는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정성왕후는 영조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한몫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을 펼쳤고 백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으로 나라를 편하게 다스렸다. 정성왕후는 정비임에도 영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나 어질고 너그러워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동구릉의 원릉은 영조(조선 제21대 왕)와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다. 영조는 후기 조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왕이다. 영조는 51년이 넘는 세월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영조 이후 조선 왕실은 적장자는 물론 제대로 왕위를 이을 왕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두 명의 왕후 정성왕후와 정순왕후는 자식이 없었으며 후궁 정빈이씨에게 첫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9살에 죽고 영조가 41세에 겨우 다시 아들을 보니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으니 27세였다. 영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숙종의 왕비는 4명이었다.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는 세상을 뜨고 1681(숙종 7)년에 경릉(추존 덕종) 근처의 '익릉'에 자리 잡았다. 13살에 왕비가 되어 후사도 없이 19살에 세상을 떴고 나홀로 능에 묻혔다. 후궁으로써 첫 왕자를 낳고 왕비에 올랐던 장희빈의 묘도 주변에 자리했다.첫 왕비 인경왕후와 마지막 왕비 인원왕후는 비교적 평안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였던 희빈장씨는 정치의 영향을 받아 왕비 책봉과 폐비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결국 두명은 숙종과 명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시 동구릉의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첫 왕비 인열왕후가 1635년 김포 장릉에 묻히고 인조가 1645년에 승하하니 함께 합장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 12살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를 계비로 맞이했다. 29세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조씨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왕후, 대비와 대왕대비를 지냈고 1688(숙종 14)년에 세상을 뜨니 동구릉 휘릉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남양주에는 왕릉 4기(광릉·홍릉·유릉·사릉)가 있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왕의 무덤이 있으니, 바로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묘’다. 조선의 두 번째 폐왕 광해군의 묘는 1623년 강화도에서 죽은 부인 류씨(문성군부인)의 무덤이었다. 18년 후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뜨니 군부인 옆에 쌍분으로 자리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자 세자가 되어 아버지 선조와 역할을 나눠 나라를 살폈고 왕이 되어서는 개혁정치를 펼치며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로 나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육군사관학교 근처에 태강릉(태릉과 강릉)이 있다. 인종의 효릉과 모후 장경왕후의 희릉이 나란히 있듯이 이곳에도 문정왕후(태릉)와 아들 명종 부부(강릉)가 가까이 있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에 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인종에 이어 갑작스레 왕이 되니 12살이었다. 문정왕후의 8년 섭정과 외삼촌 윤원형, 그의 첩 정난정, 승려 보우가 정세를 이끌었다. 재위 22년,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유교국가에서 대놓고 불교를 앞세우니 조정은 늘 시끄러웠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왕릉에는 두 개의 정릉, 신덕왕후(貞陵)와 중종(靖陵)의 능이 있다.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선릉(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과 함께 하고 있다. 중종이 여기에 묻히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1544(중종 29)년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장경왕후가 묻혀있던 고양의 희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며 묘호를 정릉으로 바꿔 정했다. 그런데 1562(명종 17)년 세 번째 왕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정릉에서 서초동 현 위치로 천장하고 본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되돌렸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려 했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신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연산군은 조선 최 초로 재위 중인 왕과 왕비의 맏아들로 태어나 원자와 세자를 거쳤으니 단연 적통 중의 적통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창덕궁이 건립된 이후 ‘인정전’에서 조선왕 최초로 즉위하니 ‘어진 정치’를 실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간과의 불화, 무력으로 대신을 억누르며 어머니 폐비에 대한 복수심으 로 참극을 벌이며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후 죽음을 맞아 일반 묘에 묻혔으니 단종 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선릉+정릉)은 42기 조선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선릉은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정현왕후, 정릉은 아들 중종이 잠든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쳐 불을 질렀기에 시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왕으로 꼽힌다. 세조(조선 제7대 왕)는 성종을 “도량이 태조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고, 정조(조선 제22대 왕)는 “조선왕가의 성대한 시기를 만든 성군”이라 극찬했다. 성종은 3명의 왕비에 후궁이 14명이었다. 31명의 자식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오릉의 ‘창릉’은 예종(이황, 조선 제8대 왕, 1450~1469)과 안순왕후가 묻힌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형 덕종의 ‘경릉’이 세자의 무덤이었던 반면, 창릉은 서오릉 최초의 재위했던 왕의 능이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형제가 이웃하고 있다. 예종은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죽자 뒤를 이어 세자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는 17세에 아들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
글 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 고양시 서오릉(궁 서쪽의 5개 능)은 평일 낮에도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에는 가장 먼저 ‘경릉(敬陵)’이 들어섰다. 추존 덕종(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능이다. 1457(세조 3)년 의경세자가 20세에 죽자 정역(효령대군의 장인)의 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 그 후 의경세자의 아들 잘산군(성종)이 왕이 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세자빈 한씨는 왕비에 이어 왕대비로 봉했다. 능호는 경릉이라 지었다. 1504(연산군 10)년 소혜왕후(당시 인수대비)가 세상을 뜨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 남양주에 있는 ‘사릉(思陵)’은 17세의 젊은 남편 단종(조선 제6대 왕)을 잃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왕후는 15세에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가 됐다. 부귀영화를 손에 쥐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만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남편인 왕은 폐위되고 유배되고 죽임을 당했다. 친정은 멸문하고 본인은 폐비가 되어 궐문 밖으로 내쳐졌다. 생이별과 죽음은 부부를 영영 갈라놓았다. 왕후는 자식도 없이 단종 사후 64년을 외롭고 힘들게 지내다 82세에 세상을 떴다. 그나마 양아들 정미수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 대왕의 무덤이다. 서울 경복궁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에 어찌 왕의 무덤이 있는가. 왕릉은 궁궐에서 반나절 행차의 거리에 조성한다. 그러니 장릉은 애초 왕릉 자리가 아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다.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몰래 아들들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팽개쳐졌다. 241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 ‘장릉’이라는 능호를 정하자 비로소 왕릉이 됐다. 장릉은 조선왕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1913년 11월 5일 진도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에 있었던 1년간 제자가 생겼다. 신문명과 신지식에 목마른 청년이었다. 손정도는 제자가 된 19살 허도종(許道宗)을 데리고 평양행 길을 떠났다. 도중에 서울에 들러 청년을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허도종은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평양 집에 도착했다. 1년 6개월 만이다. 부인은 손정도를 몰라봤다. 고문으로 몸과 얼굴이 몰라보게 상하여 있었던 거다. 그해 겨울 가족과 지내며 몸을 추슬렀다. 이듬해 19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열렬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1931년 2월 19일 오후 12시 중국 길림성 시내 동양병원에서 손정도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손정도는 목사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시정부의 통합자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정자였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추앙하고 흠모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장남은 손원일인데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의 52년 생애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만주라는 땅만주는 중국 동북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고자치구를 포함하는 지역이나 원래 동쪽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북쪽으로 아무르주, 하바롭스크 주변지역까지 포함한다. 비옥한 평원을 가진 만주는 역사적으로 그 경계와 지배세력이 정세에 따라 크게 변동을 겪어왔다.고대 만주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땅이었다. 만주는 한민족 5000년 역사의 3/4 기간 동안 역사무대였다. 중국 대륙에 진(秦, BC221~BC206)나라를 시작으로 전한(前漢, BC201~AD4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세종대왕 부부는 조선 왕실 처음 합장릉에 자리했다. 부부의 정과 서로의 역할도 출중했다. 세종의 처세는 달랐다. 인간적인 배려와 제도적 성과를 중시하며 덕치를 펼쳤다. 왕은 성실하고 꼼꼼하며 창의적이었다. 부왕이 추천한 인사를 끝까지 믿고 ‘의논’하며 정사를 돌봤다. 소헌왕후 또한 최고의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와 동생이 노비로 전락했으며 자신도 폐비가 될 뻔했지만 왕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본분을 다했다. 왕과 왕비의 인품과 덕망이 궁내외의 백성에게 신뢰와 화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고된 노동과 준비의 시간(1911~1918)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분위기가 일변했다. 홍범도 같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당국의 감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일본을 자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911년 홍범도를 비롯한 이상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빼고, 생업을 장려한다는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러시아 당국의 압박 때문에 취한 고육책이었다. 홍범도도 ‘권업’에 나섰다. 1912년 가을, 동지들과
조선왕릉 42기 중 영릉 명칭을 가진 능은 세종(英陵), 효종(寧陵), 추존 진종(永陵)의 능이다. 역사상 최고 임금인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은 소헌왕후가 한 봉분에 묻힌 조선 최초 합장릉이다. 원래 아버지 태종의 헌릉(서초구 내곡동) 주변에 있었으나 1469년 예종 1년에 여흥(여주)으로 천장했다. 엄청난 왕릉 이전작업을 거쳐 이곳 여주의 명당에 온 것이다. 영릉은 세종의 국민적 인기를 나타내는 역사와 문화, 과학의 학습장이기도 하다. 세종의 성공에는 소헌왕후의 뒷받침이 컸다. 왕후는 8남 2녀로 총 10명의 왕자와 공주를 낳아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