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그날의 만세 소리와 함께 시작된 독립운동은 결국 26년이 지나 1945년 일제 식민치하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가져왔으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105주년 기념사를 통해 그날의 3.1정신을 되살려 오늘의 한반도 통일을 완성하자고 역설했다.윤 대통령 기념사의 의미는 그날의 독립이 우리가 원하던 독립이 아니었고 오늘의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이며, 이 통일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북한 체제의 반통일 선언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 무려 52년 전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선언은 평양 정권의 두 개 조선 전략 그 자체였다. 그때 김일성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깨달았었다. 식량 자체 해결도 어렵고 계획경제로 나라를 운영하기도 어렵다는 걸 그는 사회주의 지도자 중 가장 먼저 깨우쳤다고 필자는 생각한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리더십에 한계를 느끼고 장남 김정일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제 정신을 차리고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대결에 승리할
광주광역시가 북한 조선인민군 행진곡과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빚고 있다.정율성은 6.25전쟁 전후 중국에선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뽑혔고, 북한에선 영화로까지 제작된 인물이다.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인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장본인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위문공연단을 조직해 전선에서 북한군 위문활동을 했다.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국 행진가’는 남침 행진곡으로 쓰였으며, 전쟁 내내 북한군 사기를 북돋웠다.광주시는 동구 불로동 일대 878㎡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올해 대통령 3.1절 기념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관점은 피해자 책임주의이고 방향은 퇴행적이며 내용은 굴욕적이다. 후손이 볼까 두렵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3.1혁명을 기리는 기념사를 하면서 3.1항쟁의 정신을 깔아뭉갰다.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일본군 성노예제와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와 배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도에 대한 도발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기 바쁜 일본이다. 기념사에는 이에 대해 결기에 찬 말 한마디 없다. 무장해제의 모습이고 저자
104주년 3.1절 기념식이 1일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로 인해 기념식만 소규모로 진행됐으나 올해는 각 지자체에서 기념식뿐 아니라 독립운동 만세궐기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열면서 더욱 의미 깊은 날이 됐다.이날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누구도 자신의 당대에 독립을 상상할 수 없었던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선열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또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파르나스에서 열린 제54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의 국가조찬기도회 참석은 대통령 취임 후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이라며 “거룩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성도 여러분께서도 지혜를 모아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올해로 50년이 넘었다. 그리스도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조찬기도회가 국가권
올해로 103주년을 맞이한 3.1절 기념식이 1일 오전 서울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라는 주제로 열렸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고려해 소규모로 개최됐지만 이번 기념식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먼저 20대 대선이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103년 전의 한국과 앞으로의 한국을 극명하게 대비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103년 전의 역사는 ‘피눈물’ 그 자체였다. 과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미래를 주도할 수도 없다. 역사의 엄정한 가르침이다.또 하나의 의미는 이날 기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자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가 돼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1911년 7월에 별세했다. 새옹지마랄까? 1912년 5월에 복녕당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61세에 딸을 본 고종은 사는 맛이 났다.1914년 7월에는 광화당 이씨가 이육을 낳았고, 1915년 8월에는 보현당 정씨가 이우를 낳았다. 늦게 두 아들을 얻은 고종은 더욱 기뻤다. 그런데 1916년 1월에 이육이, 7월에는 이우가 죽었다.이 시기 다섯살 덕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김가진(金嘉鎭)이 상해에 도착할 당시 75세의 고령이었는데 이러한 망명에 이어서 또 다른 망명 시도가 대동단에 의해 극비리에 추진됐는데 그 배경을 상세히 소개한다.3.1 운동이 발생한지 6개월 후가 되는 9월에 상해임정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경성으로 파견되어 사동궁(寺洞宮)에 있는 의친왕(義親王)의 처남인 김춘기(金春基)를 만나 상해의 정세를 이야기 하고 의친왕을 임정에서 옹립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귀족과 신망이 두터운 신하들을 가담시키면 독립은 틀림없을 것으로 설득하니 김춘기는 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대동단(大同團)은 1919년 3.1운동 이후 4월경에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가입하면서 통재부를 비롯하여 기밀부, 상무부, 외무부, 재무부, 무정부 등으로 구성되었다.대동단의 조직은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時代)에 농상공부 대신과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덕망을 갖춘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한 것을 비롯하여 단장은 전협으로서 단원의 모집과 통솔에 주력하였고 최익환은 출판물을 담당하였으며, 전필순(全弼淳)이 본부의 사무책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 추진하였던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베이징(北京) 망명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권회복(國權回復)을 향한 고종황제의 항일의지(抗日意志)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의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파견이었다.거슬러 올라가서 1907(융희 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특사가 고종황제의 밀명(密命)에 의하여 헤이그로 파견되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호소하려다가 소기의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그 의로운 3.1운동이 일어난지 꼭 102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사회의 이슈는 온통 코로나19 방역이다. 보건당국에서는 지난달 27일부터 3.1절까지 이어지는 사흘 연휴 동안 방역 수칙 준수를 강력히 호소하고 나섰는바 제3 확산기를 맞은 수도권 중심으로 가족과 지인을 통한 감염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로 인해 3.1절 행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우리사회를 암담하게 뒤덮은 그림자, 코로나19 환난이 있기 전만 해도 3.1절 행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06(광무 10)년 의친왕(義親王)이 귀국하고 그 이듬해인 1907(융희 1)년 1월에 북한산성에서 거사를 결행하였는데 구체적으로 1월 15일에 의친왕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의병봉기(義兵蜂起)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는 것이다.여기서 거사가 결행된 시기인 1907(융희 1)년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1905(광무 9)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오늘은 61년 전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폭압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날이다. 선생은 아직도 서훈이 안 됐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될 조짐조차 안 보인다는 점이다. 유족은 더 이상 서훈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얼마나 한이 맺혔겠나.노태우정권까지 포함해서 이 땅의 독재정권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서훈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시작했지만 극히 적은 인원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좀 더 확대됐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빠졌다. 해방 이후 북한정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에서 도산(島山)이 향년(享年) 61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한 이후 일제는 문상과 장례조차 철저하게 통제하였다.사회장을 치르게 하지도 못하게 했고, 고향으로도 운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20인 이내에 한하여 장지까지 가기를 허락한다는 일경의 명령으로 극히 적막하게 장송하였으며, 망우리 묘역에 있는 유상규(劉相奎)의 묘소 바로 오른쪽 위에 안장하였다.여기서 유상규를 간략히 소개하면 1897년 평북 강계 출신으로서 1916년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를 졸업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제1차 세계대전이 1919년에 끝나면서 휴전하였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민회 중앙 총회(國民會中央總會)에서 이승만(李承晩)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승만은 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향하였다.덧붙이면 당시 국민회 내부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이유는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도산(島山)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적임자는 이승만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한편 이승만은 워싱턴에 도착하였으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전문학교관제(專門學校官制)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이하 ‘경의전(京醫專)’) 규정이 반포되어 경의전이 문을 열었다.입학자격은 한국인은 16세 이상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일본인은 17세 이상의 중학교 졸업자였다.수업 연한은 4년이었으며, 기초강의는 주로 1,2학년 과목으로 임상강의는 3,4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었는데 교수진은 빈약하였으니 구체적으로 교장 외에 교수 3명과 조교수 1명이 모든 학과를 전담하였다.한편 경의전 교사(校舍)는 당시 서울 이화동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연구소장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일제강압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한일강제합방이 일어난지 10년 사이에 조선 민중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졌다. 마음대로 생각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고, 몸 하나도 성하게 추스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일제의 압박에 찍 소리 하나도 못하고 있지는 않았다. 1919년 3.1 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자결권을 내세우며 희망의 기지개를 펼치는 저항성을 보였다.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기운이 잦아들면서 무단통치정책을 완화시켜 식민지에 대한 회유방법으로 이른바
지난해는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국가적으로는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을 내딛는 해였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 규제 조치로 일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 다시 일본과 맞서는 해이기도 했다.100년 전과 달라진 것은 우리의 국력이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일본 경제에 부메랑이 됐다. 우리나라는 전 기술 분야에 국산화를 모색하는 기회가 됐고, 일제 불매운동은 전 국민을 뭉치게 만들었다. 한국을 최대 무역국으로 삼은 일본 기업들은 파산위기에 직면했고, 한국 관광객을 주 대상으로 하는 일본 관광지 매
최병용 칼럼니스트민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학교 내에서 연애를 금지하는 규칙이다.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어 면학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만든 규정인데 비민주적인 규정인 듯해도 민사고 학생에 어울리는 규정 같다. 이 규칙을 위반해 교내에서 친구 이상의 애정 행위를 보이면 바로 퇴학도 가능하도록 엄격히 교칙을 집행하고 있어 학생들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민사고에는 학생회위원회란 학생 자치조직이 있다. 민사고의 학생위원회는 삼권분립이 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뉘어있어 부별로 위원장을 선출한다. 지각이나 외부음식 반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