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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보다 어려운 수성, 태조 이성계 곁에 ‘계영배’가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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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처세와 경영을 말하다<3>]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 태조 이성계 곁에 ‘계영배’가 있었다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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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준 SG전략연구원장, 왕릉답사가

출세와 행복은 동전의 양면인가. 천하의 권력자나 자산가 중에는 ‘평범한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흔하다. 태조 이성계는 519년 조선왕조를 세운 위업에도 말년에 가장 불행한 세월을 보냈다. 57세의 태조는 든든한 대신들, 젊은 왕비, 듬직한 자손들과 백년대계를 꿈꾸며 보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왕세자 책봉 이후 벌어진 갈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사랑했던 신덕왕후의 옆에 묻히고자 했지만 이 또한 자식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건원릉에 홀로 누워 613년의 비바람을 견디고 있다. 주변에 처자식도 신하도 없다. 

◆명분을 따르는 ‘결단의 리더십’ 

이성계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며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사익을 뒤로하고 본분을 다했다. 이는 신진사대부이자 혁명적 무신으로써 그의 진가를 발휘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두 걸음 전진, 한 걸음 후퇴’의 유연함을 가지고 결정적 순간에 과감히 나섰다. 말기의 고려는 혼란스럽고 무능한 나라였다. 왕은 무력했다. 1170년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 100년간 나라의 기강은 무너졌다. 반란과 민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빈번했다. 전염병, 화재, 홍수 그리고 지방관과 권세가들의 수탈에 백성은 궁핍해졌고 원망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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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한양 천도에 이어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며 지금 서울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경복궁, 흥인지문, 남대문 등을 지었고 한양 도성을 축조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2.07

이러한 배경에서 이성계가 등장했다.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이성계는 이때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나이 26세였다. 이때부터 공민왕에게 인정받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우왕 이후 수문하시중, 동북면 도원수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부패한 권문세족을 척결하며 권력도 얻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시중 이인임이 권세를 휘두르고 임견미·염흥방·도길부 등이 요직을 차지하여 매관매직을 하며, 탐욕과 포학으로 남의 전정(田丁, 농사짓는 장정)을 빼앗아 관청과 민간이 빈곤하였다. 최영과 더불어 우왕을 인도해서 이들을 제거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여 길가는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왕은 이성계를 수문하시중(종1품)으로 삼았다”고 돼 있다.

◆신중한 처세와 기회의 탐색    

운명을 바꾼 상황이 다가왔다. 명나라 황제가 철령 이북의 땅을 탐내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기로 했다.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주장했다. ①큰 나라에 거역 ②여름철 무리한 군사 동원 ③왜적의 침략 가능성 ④장마철 군사들의 역병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 좌군도통사, 이성계 우군도통사로 삼아 공격을 명했다.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많은 병사가 도주하고 강물을 건너다 수백 명이 빠져 죽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을 감행했다. 막강한 군대를 지휘한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고 최영은 귀양길에 올랐다. 조인옥이 우왕을 폐하고 왕씨를 임금으로 추대코자 했다. 우왕은 환관 80명을 거느리고 이성계·조민수 등을 치려다 실패했다.

이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다. 1389년 중국 황제가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고려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을 구실삼아 이성계 일파가 왕대비 안씨(공민왕 제4비)의 교지를 받아 창왕을 폐하고 왕요(공양왕)를 왕으로 세웠다. 또한 이듬해 이성계 일파가 명나라를 치려한다며 명나라에 밀고한 윤이·이초 사건을 계기로 이색과 우현보, 권근 등을 내쳤다. 정몽주도 선죽교에서 피살됐고 공양왕도 폐위됐다.

태조는 정몽주의 죽음에 망연자실하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네가 이리 불효한 짓을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했지만 모든 권력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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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27일 정자각에서 태조의 제향을 지낸다. 건원릉의 특징은 조선 최초 왕의 능이자 유일하게 세 글자로써 개국왕의 의미를 두고 있다. 봉분이 억새풀로 덮였으며, 보물로 지정된 신도비가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2.07

◆팀워크, 왕을 만들다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을 규합해 고려권문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조선 개국까지 뜻과 행동을 함께한 신덕왕후, 정도전, 배극렴, 한씨의 자식들, 이복동생 등 많은 ‘이성계 팀(team)’이 있었다.  죽어서도 그의 묘정에 함께한 공신 7명을 포함한 52명의 중추적인 인물들은 30년간 우정과 팀워크를 유지하며 결국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 7월 16일에 “배극렴·조준 등 52명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니 모두 뜻을 같이하였다”고 했다. 태조가 두세 번 사양하다 마지못해 수락했고 다음날 수창궁(개성의 왕궁)에서 즉위했다. 그는 겸손했다. “내가 수상이 되어서도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어찌 왕을 생각했겠는가?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이니, 경들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 서서 조회를 받았다. 8월 7일이 돼 신하들이 간청하니 그때서야 앉아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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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년 태조와 함께하는 ‘무석인’. 태조는 무인으로써 겸손과 원칙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수많은 전공을 쌓아 조선을 창업한 군주가 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2.07

◆4년 만에 모든 걸 잃다

태조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가장 의지하고 사랑한 신덕왕후 강씨의 죽음이었다. 강씨가 1396년 6월 26일 병이 나자 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조는 중 50명을 모아 부처에게 빌었고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석방했다. 이죄는 일죄(一罪)인 사형 다음의 죄다. 8월 들어 병환이 위독해졌다. 8월 12일 태조가 직접 찾았으나 다음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태조가 통곡하며 슬퍼했고, 직접 나서서 행주와 안암동의 능지를 본 후 마땅치 않았고 열흘이 지나 취현방의 능지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4월까지도 신덕왕후의 혼령을 위로코자 행차를 했다. 

태조에게 시련은 계속됐다. 정도전과 아들들의 죽음이었다. 1396년 12월 명나라는 표전문(황제, 황후·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의 내용을 트집 잡았다. 정탁과 김약항이 썼고 정도전이 교정책임자였다. 명나라는 정도전을 겨냥했다. 정도전은 명의 부당한 요구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중앙군사력 강화와 사병 혁파도 추진하며 한씨 소생 왕자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왕자들. 1398년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종친을 해치려 한다는 핑계로 정도전·남은 등의 공신과 세자 방석과 방번, 이제(태조 사위)까지 살해했다. 

이 사건은 태조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아버지가 왕좌에 있는데도 아들이 주요 대신과 왕세자, 어린 아들과 사위까지 죽이는 것은 가정이나 나라에서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태조는 1398년 9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떠났다. 그러나 2년 후 형 이방간과 동생 이방원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자칫 친형제를 죽일뻔 했다. 이에 정종이 물러나고 태종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을 다시 접한 태조는 자식에 대한 울분과 원망으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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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신도비’. 왕릉의 비각에는 신도비나 표석이 보존돼 있다.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 최초의 왕릉 신도비로써 화려하고 장엄하다.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형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2.12.07

◆계영배의 지혜가 아쉬웠던가

태조는 즉위 이후 위민정책을 폈다. 1393년 경기도에 실시한 양전을 즉위 후 전국에 확대했다. 땅을 재분배하는 전제개혁과 노비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했다. 한양천도, 경복궁 건설, 한양도성의 축조와 1397년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건립 등 오늘의 서울을 있게 했다. 요동 정벌 추진과 왜구의 대마도 공격을 감행하며 각 분야에서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러나 10세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며 환난이 닥쳤다. 왕후의 아들이니 세자가 될 수 있지만 한씨 소생 6남 2녀의 존재감이 무색해졌다. 대신들도 마땅해하지 않았다. 태조가 기승전(起承轉)으로 짜 맞추려 하니 반발이 컸다. 악수임에 틀림없었다. 만일 태조가 “방과에게 권력을 물려주니 형제들이 협력하라. 왕후와 왕자들과 백의종군해서 살겠다”고 했다면 출세와 행복을 다 얻지 않았을까. 왕후를 설득해 단호하고 지혜로운 결단을 했어야 했다. 바로 계영배(戒盈杯: 술을 어느 한도 이상으로 따르면 술잔 옆에 난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의 지혜를 짜내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건원릉 억새풀처럼 회한은 남아

태조는 61년간 앞만 보고 승승장구했으나 4(1396~1400)년간 모든 것을 잃었다. 권력의 상실, 아내와 자식, 평생 동지들의 죽음에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아들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8년 후 그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태조가 담이 심했다. 부축해서 앉게 하여 소합향원을 드렸다. 증세가 급해졌고 태종이 달려왔다. 청심원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태종실록1408년 5월 24일> 

태조는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3세에 숨을 거뒀다. 신덕왕후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하륜이 능지를 찾던 중 김인귀가 “내가 사는 양주 검암에 길지가 있다”하여 가보니 과연 좋았다. 이내 박자청에게 건원릉 조성이 맡겨졌다.

홀로 묻혀있는 조선의 왕은 태조, 단종, 중종뿐이다. 대부분 왕 부부는 부부 사이가 좋든 나쁘든 죽어서는 함께 묻혔다. 홀로 묻힌 것도 분한데 한양에서 왕복 90리길(36㎞) 머나 먼 양주에 묻힌 태조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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