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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의 역사 (1)
기획 문화기획 이정은 역사

[역사칼럼] 판문점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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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판문점은 서울에서 52㎞, 개성에서 10㎞ 지점의 휴전선 상에 있으면서도 155마일 휴전선에 유일하게 철책이 없는 구역이다. 공식 이름은 유엔군사령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일반적으로 공동경비구역(JSA) 또는 판문점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특급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해당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남과 북 어느 쪽 영토도 아니다. 

동서 800m, 남북 600m의 네모꼴 JSA에는 유엔사령부 측과 공산 측(북한, 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운영을 위해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의 군사분계선(MDL) 상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설치, 휴전선 상에 유일하게 철책 없이 남북한군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JSA 남측에는 ‘자유의 집’, 북측에는 ‘판문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그 옆으로 각각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측 ‘평화의 집’과 북측 ‘통일각’이 있다. 판문점은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돼 오다가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 남북 공동 성명 채택 등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이나 남북한 주요 회담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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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JSA)이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UN과 북한 측 공동경비구역으로 정해진 구역이다. 

◆ 널문리에 얽힌 역사  

판문(板門)이란 우리말로 ‘널문’ 또는 ‘널빤지 문’인데,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의 「장단부 지도」에 ‘판적교(板積橋)’라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근처에 현재의 판문점이 있다. 그 얼마 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군현지도〉의 「장단부 지도」와 1782년에 조선 정부가 편찬한 〈1872년 지방지도〉의 「장단부 지도」에 ‘판문교(板門橋)’가 나타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일성록〉〈내각일기〉 등에는 이곳을 ‘판문평(板門平)’이라고 한 지명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이 수도 송도(개성)의 교외에 있어 한량들의 놀이터로 유명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 29일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판문점 부근에서 장단부사 마고연이 마련해 온 음식을 먹고 의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곳이기도 했다.  

6․25전쟁 전 널문리는 이랑이 콩밭과 초가 3채, 작은 주막이 전부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휴전 회담 장소가 되면서 갑자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판문점이란 이름도 마을 이름을 휴전회담 공용어인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표기해야 했는데, ‘널문리’를 중국어로 표기하기가 어려워 널문의 한자 ‘판문(板門)’에 가게를 의미하는 ‘점(店)’자를 넣어 새로 판문점이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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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서명 (제공: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천지일보 2022.12.06

◆ 처음에는 개성에서 회담 

휴전이 논의되게 된 과정은 이렇다. 6.25전쟁은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무력 앞에 발발 1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3일 후인 9월 18일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 11월에는 압록강과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중국이 100만 대군을 투입하며 참전했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이 대대적인 동계 공세를 가해와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1년 6월, 전쟁이 1년간 계속되면서 공산군은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점차 열세를 보이며, 자신들의 힘으로 한반도 전역을 석권할 수 없고, 전쟁이 수년간 장기화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을 방문하고, 중국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1951년 6월 13일 김일성과 중국 및 소련의 스탈린은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으로 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열흘 뒤인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유엔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미국이 소련의 제의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8일 첫 예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회담장소는 개성 북쪽 고려동 396번지 옛 요정 내봉장(來鳳莊)이었다.   

개성의 내봉장이 회담장이 된 것은 문산에서 개성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올 수 있는 조용한 곳이고, 북한군 관할 하에 회담장을 잡도록 한 스탈린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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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휴전회담장 내봉장(來鳳莊) (제공: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천지일보 20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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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3채와 주막 하나밖에 없는 한적한 널문리 마을에 설치된 휴전회담장 (제공: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천지일보 2022.12.06

벽돌담에 둘러싸인 내봉장은 각종 정원수와 화분이 있는 300평 넘는 정원에 연못과 아담한 정자가 있는 우아한 기와집이었다. 정원의 정자를 지나면 사랑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쪽의 안채가 정전회담 장소였다. 사랑채는 공산 측의 대합실로 쓰고, 유엔군 측에는 안채 우편에 천막을 쳐서 대합실을 만들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왼쪽과 오른쪽에 두 개 있었기 때문에 회담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좌익인 공산군 대표들은 언제나 왼쪽 문을, 유엔군 대표단은 오른쪽 문을 이용했다.  

7월 8일 쌍방의 연락장교 회의를 통하여 절차 문제를 합의한 후 7월 10일에 쌍방 대표의 상견례에 이어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은 공산 측의 정치적 주장을 앞세우는 바람에 공전하다 16일 만인 7월 26일에야 비로소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의 의제합의를 보았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소 주변에서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였다. 9월6일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는 회담장소의 중립성 문제를 들어 회담장소를 변경할 것을 공산군 측에 통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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