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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보완하는 찬물 국
오피니언 칼럼

[걸공(乞空)의 음식칼럼] 밥을 보완하는 찬물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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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국을 한자로 말하면 갱(羹)이라고도 하고 학(矐)이라고도 하며, 탕(湯)이라고도 한다. 갱(羹)·학(矐)·탕(湯)은 어떤 관계이며,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

중국의 기원전 3세기경 시집인 ‘초사(楚辭)’에는 갱(羹)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이고, 학(矐)은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이라고 하고, 나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갱(羹)이라고 하고 순 고기만으로 끓인 것을 학(矐)이라 한다. 조선 말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도 ‘나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갱(羹)이라고 하고, 순 고기만으로 끓인 것을 학(矐)이라고 한다’라고 나온다. 

그러나 6세기 초 북위(北魏)의 가사협(賈思勰)이 편찬한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 기술 서적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고기에 장, 파 등 여러 채소를 넣고 푹 삶아낸 것은 갱(羹) 또는 학(矐)이라고 했다. ‘초사’나 ‘목민심서’의 설명처럼 갱(羹)과 학(矐)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해 놓지 않았다. 

고려(고종 28) 1241년에 대학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학전불사의(矐臇不辭欹): 곰국은 있는 대로 사양치 않아”라고 읊었다. 

12세기 원나라 때 초기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의 국은 대부분 갱(羹)이며, 탕(湯)은 음료용과 약용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1527년 최세진(崔世珍)이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학(矐)을 고기탕이라 했으며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학(矐)을 육갱(肉羹)이라고 했다.

1610년 구암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약이성(藥餌性) 재료를 열탕에 달여 질병 또는 보강제로 사용한 것을 탕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정조지(鼎俎志)에는 향약초를 끓여 마시는 열탕을 모두 탕이라고 부르고 있고, 조선시대 말기 궁궐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 지규식(池圭植)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도 ‘황기사물탕(黃芪四物湯)’ 등 주로 약재에 탕(湯)을 기록했다. 

1800년대 말경의 작자 미상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제사에 쓰이는 국을 탕(湯)으로 쓰고 있다. 오늘날에는 국은 일반 용어로 쓰고 학(臛)은 쓰이지 않는다. 갱(羹)은 제물, 탕은 약이나 음료 또는 오래 끓인 뜨거운 국이 되기도 하고 특히 탕의 경우 의식동원의 의미를 나타내는 음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귀한 재료를 정성들여 오래 끓인 제물인 국을 탕(湯)으로 제상에 진설하고 있다. 

국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 먹기 시작했을까. 국은 육류, 어패류, 채소류, 해조류 등 모든 식품 재료를 이용하는 단순하게 끓이는 조리법으로써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토기 사용으로 습열 조리가 가능한 증숙(蒸熟) 문화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국의 조리가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국의 역사는 숟가락 사용과 함께 유추할 수 있고 청동기 시대 길림성 유적에서 뼈로된 숟가락과 낙랑고분의 청동 숟가락이 출토된 것을 볼 때 이 시기에 국의 상용화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본기5 226(동천왕 원년)년에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왕후가) 시자를 시켜 반상을 드릴때에 일부러 국을 왕의 옷에 엎지르게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궁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국 기록이 있는데 당시 문장가 최치원이 쓴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에서 “헛되게 밥만 먹으니 국에 맛을 조화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는 구절이 보이고, 고려시대에는 여러 문헌에 국이 수록되어 있어 국의 다양화와 더욱 발달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016(헌종 7)년 왕자 탄생에 염분과 함께 어량(魚梁)을 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곽전(藿田)도 하사한 기록이 뵈는데 곽(藿)은 미역을 말하므로 당연히 미역국이 끓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2권에 ‘공부시랑(工部侍郞) 유응규의 아내가 산후에 병들었는데, 나물국뿐이었다’라고 나오고 고려말 문사인 가정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는 비교적 나물국 등 국에 대한 글이 많이 나오는데, 한 구절 소개하면 “규갱향반조산신(葵羹香飰調酸辛): 나물국에 향긋한 밥 온갖 양념 다 맞췄네”라고 했다. 

이 밖에도 이규보의 시에는 토란국, 냉국 등이 보이고 목은 이색의 시 속에도 나물국이 등장 한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제례의 제물에는 1품에서 2품까지 밥과 갱이 각각 두 그릇 진설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음식 관련 문헌에는 맑은장국, 토장국, 고음국, 냉국 등 다양한 종류의 국이 선보여졌고, 1766년(영조42)에 유중림(柳重臨)에 위해 간행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완자탕, 계란탕, 문어탕, 낙지탕, 오징어탕, 홍합탕, 모시조개탕, 맛살조개탕, 목탕, 게탕, 토란국, 토란줄기국, 미나리국, 두릅국, 소루쟁이뿌리국, 소루쟁이잎국, 아욱국, 원추리국, 삽주싹국, 미나리국, 두릅국, 소루쟁이뿌리국 등 다양한 조리법의 국이 선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간전개형 차림인 반상의 기본 구성에서 국은 밥을 보완하는 제일의 찬물이며 매끼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음식으로 자리를 차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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