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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김구 하수인이 아닌 동반자 관계, 尹단독거행 계획에 김구가 배후서 도와”
문화 문화일반 인터뷰

“윤봉길은 김구 하수인이 아닌 동반자 관계, 尹단독거행 계획에 김구가 배후서 도와”

‘윤봉길 친조카’ 윤주 윤봉길기념사업회 부회장 인터뷰
선서문 실제 작성자는 김구, 윤봉길은 서명만… 처음 공개되는 사실
‘선서식 날짜 4월 26일→27일’ ‘암장 장소 알려준 사람’ 등 바로잡기
“고증 없이 새로운 사실 찾아낸 것처럼 발표하면 잘못 인용돼 문제”
“中人 의거 관여 허위주장 난무, 바로 잡아 정확한 역사로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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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효창원 내 윤봉길 초상화와 위패가 모셔진 곳에서 윤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윤 의사가 김구 선생의 행동대장이나 하수인으로 세간에 잘못 인식되고 있으나 동반자 관계라는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2.08.28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1932년 4월 29일)는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겨우 이름만 유지하던 임시정부(임정)를 소생시킨 것은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당시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큰 감동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했다. 그 덕분에 해방 후 조선이 바로 독립될 수 있게 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윤 의사의 상해의거였다.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75)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은 갓 20세가 되던 1966년부터 기념사업에 참여해 지금까지 56년간 윤 의사의 선양사업에 일평생을 바쳐왔다. 그는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1916~2003) 아들이다. 올해 광복 77주년을 맞은 가운데 윤 부회장은 윤 의사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본지와 인터뷰를 나눴다.

◆김구·윤봉길 의거의 동반자 관계

우선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와의 관계다. 세간에는 윤 의사가 김구의 지시대로 움직인 행동대장이나 혹은 암살 하수인으로 알려졌으나 둘은 상해의거를 도모한 동반자관계라는 것. 윤 부회장은 “윤 의사가 단독으로 거사에 대한 먼저 밝혔고 김구가 폭탄을 마련해 줌으로써 배후에서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윤 의사가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상해로 왔으나 임정이 이름만 유지할 정도밖에 되지 않자 크게 실망해 미국 유학을 준비할 정도로 당시만 해도 임정이 무력했다. 윤 의사가 유학비용을 마련하려고 모자공장(중국종품공사)에 근무할 때 김구가 몇 번 들러 공장에 근무하는 한인 공우들과 시국문제를 토론했는데 임정의 무력함에 실망해있던 윤 의사는 김구와 특별한 교분을 쌓진 않았다. 당시 윤 의사는 한인공우친목회 회장이었다. 김구에 대해서도 윤 의사는 보통의 애국지사 정도로만 여겼는데, 김구를 달리 보게 된 계기는 후배 유진만의 집에 갔다가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준비해 준 사람이 김구 선생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인물이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윤 의사는 도미유학 계획을 포기하고 혁명을 결심해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며 정보를 얻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러다가 4월 24일에 ‘오는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일본 교민신문기사를 보고 거사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김구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구는 전도가 창창한 청년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잠시 망설였지만 윤 의사가 간절히 요청하는 데다 논리 정연한 설득과 비장함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고 그 뜻을 받아들여 폭탄을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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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의거 거사를 앞두고 태극기 앞에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의거는 윤 의사가 단독계획했고, 김구 선생이 폭탄을 제공해주는 등 배후에서 도왔다. (제공: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천지일보 2022.08.28

임정 내부에서는 윤 의사의 의거가 만약 실패하게 되면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반대가 심했다. 그때 김구가 이들을 설득하고자 재치 있게 낸 생각이 ‘의거가 실패하더라도 2개의 폭탄 중 하나는 자결용으로 쓸 것이기에 임정의 배후를 전혀 모를 것’이라고 말했고, 결국 동의를 얻어냈다. 윤 의사가 몸에 지닌 폭탄은 물통과 도시락용 두 개였고, 실제는 모두 현장에서 사살에 사용할 의거용이었다. 하지만 의거 성공으로 던져진 폭탄은 물통용이었고, 나머지 도시락 폭탄은 재차 폭탄을 던지려는 중에 일본군에게 제압당해 미처 사용하지 못했다. 물통용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도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폭탄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윤 부회장은 “상해의거는 중국 정부가 거사 동반자인 김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의거였다. 김구 선생 또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거목으로 우뚝 서게끔 한 것도 상해의거였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국무위원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구 혼자만이 모든 이로부터 추앙받는 천하의 영웅으로 등극한 반면 다른 국무위원들은 신상에 위험만 닥쳤기 때문이었던 것. 논쟁 끝에 김구가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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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선서문과 권총, 폭탄을 양손에 들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공: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천지일보 2022.08.28

◆선서식 날짜 정정, 선서문 실제 작성자는 김구

윤 부회장은 윤 의사와 김구가 의거를 앞두고 만나 맹세한 선서식이 4월 26일이 아니라 ‘4월 27일’이라는 점과 선서문은 윤 의사가 직접 쓴 것이 아닌 ‘김구가 썼고, 윤 의사는 서명만 했다’는 점도 바로 잡는다고 밝혔다. 이는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워낙 거사일이 얼마 남지 않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촉박한 상황이었기에 김구가 미리 준비한 선서문과 태극기, 폭탄, 권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것. 윤 부회장은 “김구는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간부에게 피격당하면서 이후 글씨는 떨림체였다”며 “이는 선서문에서 엿볼 수 있고, 평소 윤 의사 글씨체와는 상이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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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선서문. 윤 의사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구 선생이 쓰고 윤 의사는 서명만 한 것이라는 게 윤주 부회장의 설명이다. (제공: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천지일보 2022.08.28

해방 직후 윤 의사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암장 장소를 알려준 사람은 일본여승 ‘야마모도류도’가 아니라 형무소 간수였던 일본군 ‘시게하라’라는 점도 바로 잡아야 할 점으로 꼽았다.

또한 상해의거에 중국인 ‘왕야치아오’와 조선인 ‘이화림(본명 이춘실)’이 가담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들은 상해의거와 전혀 관련이 없고 행사장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꼽았다. 윤 부회장은 “일부 학자들이 고증 없이 뭔가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처럼 발표하면 이를 다른 사람이 인용해 발표하다보면 잘못된 정보가 세간에 알려지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인들이 윤 의사가 자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점을 이용해 상해의거에 관여한 것처럼 말하는 허위 주장들이 난무한다”며 “이를 바로 잡아 정확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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