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20)
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20)

image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중요한 변수가 발생하였으니 1932년 1월 일제가 상하이(上海)를 침략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상하이에서 항전을 계속하던 중국 19로군과 난징(南京) 정부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에 속하였던 중국측 구성원들이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영(李會榮)이 중대결심(重大決心)을 하였으니 만주에 가서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사령관(關東軍司令官)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國民黨) 우즈후이(吳稚暉), 리스청(李石曾) 등과 의논하여 만주에 한중 연합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기로 계획하였으며 둘째 형 이석영(李石榮)에게 작별인사(作別人事)를 하였다.

마침내 1932년 11월 초순에 이회영은 상하이 황푸강 부두에 도착하여 거기서 영국 선적인 난창호에 승선하였다. 이회영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만주행의 장도에 올랐으나 11월 5일 다롄항(大連港) 부두에서 수상경찰(水上警察)에 의하여 체포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우당(友堂)은 체포된 이후 다시 뤼순감옥(旅順監獄)에 수감되어 12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11월 17일 장렬히 순국(殉國)하였으니 향년(享年) 66세였다. 이로써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만주로 6형제가 집단 망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을 비롯해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회영이 통탄스럽게도 만주에서 웅대한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다롄(大連)에서 일제에 의하여 체포된 이후 뤼순감옥(旅順監獄)에서 순국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회영이 1865(고종 2)년생으로, 우두의사(牛痘醫師)로서 20년 이상 우두시술(牛痘施術)을 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던 증조부(曾祖父) 박승석(朴勝錫)보다 2년 연하(年下)가 되는데 과연 증조부가 우당과 어떠한 교류가 있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으나 동시대(同時代)를 함께 살았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광복(光復) 이후 1948년 8월 15일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李始榮)은 초대 부통령(初代副統領)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회영은 1962년 3·1절에 정부로부터 아들 이규창(李圭昌)과 함께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을 포상 받았다.

이상과 같이 20회에 걸쳐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생애(生涯)를 연재하였는데 생애의 대부분을 항일운동(抗日運動)에 투신하였던 이회영의 순국 90주년을 숙연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우리사회에 그 숭고한 생애가 널리 알려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지면구독신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