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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17)
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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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이회영(李會榮)이 7년 만에 다시 만난 김종진(金宗鎭)을 결국 아나키스트로 전향시켰다는 사실을 통하여 아나키즘에 대한 우당(友堂)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덧붙이면 김종진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자유합의에 의한 운동을 추구한다는 아나키즘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도 그동안 독립운동(獨立運動) 단체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을 지켜보면서 그 원인이 권력중심의 지배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이회영의 설명에 깊은 공감대를 느끼면서 결국 그도 이회영에 이어서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27년 국내에서 좌우합작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1928년 5월 상해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으며 기관지로서 ‘탈환’을 발행하고 여기에 축사를 기고하였다. 같은 해 1928년 7월에는 남경에서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필리핀, 대만, 일본, 월남 등 여러 나라 대표들과 함께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大會)를 개최하고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대회에 이회영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구체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 제하의 글을 보냈는데,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무정부주의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1930년 4월에 베이징(北京)에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 무정부주의자의 전체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이회영을 비롯하여 김종진, 정현섭(鄭賢燮), 백정기(白貞基) 등 2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회영의 의견에 따라 만주에 독립운동의 모든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으며 상하이(上海)를 비롯하여 푸지엔(福建), 베이징(北京)에 연락원(連絡員)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회의가 개최된 이후 일경(日警)이 북경위수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아나키스트들의 거처를 급습하여 10여명을 구속하였다.

이와 관련해 신현상(申鉉商)과 최석영(崔錫榮)이 베이징에 잠입하였는데 첩보를 입수한 일제가 중국 경찰에 조선 강도단이 잠입하였다는 미명하에 체포를 의뢰해 결국 거처를 급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회영은 톈진(天津)에 갔기 때문에 체포를 피할 수 있었으며 긴급히 당시 군벌의 막료들과 친분이 있었던 류기석(柳基石)에게 연락하여 체포된 조직원들의 구명활동(救命活動)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국내에서 8만원이라는 거금(巨金)을 모집한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모든 조직원들이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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