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의자왕에 대한 흔히 알려진 이미지는 ‘무능한 왕’ ‘삼천궁녀에 빠진 왕’이다. 왕만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충신을 제외한 백제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바빠 나라의 안위는 돌아보지 않았다는 게 백제의 ‘멸망 스토리’다. 반면 계백은 지금까지도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상반된 평가의 배면에서 접근한다. 저자에 따르면 삼천궁녀는 애초에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주색에 빠졌다는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자왕은 한때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로 총명했다. 신라에 대한 공세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던 왕이기도 했다.

의자왕의 성품을 따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의자왕이 말년에 실각을 해서 백제가 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왜 삼국사기와 몇몇 설화는 의자왕을 조롱하고 있을까? 어렵지 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데에는 잘못된 성향이 예외 없이 작용한다. 잘되면 그 공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지배층이 있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사실 백제가 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요소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흔히 알려져 있듯 간신들 때문도 아니요, 왕비의 권력다툼 때문도 아니었다. 멸망의 일차적 요인은 나당연합군의 백강 상륙을 막지 못한 데 있겠지만, 제대로 알고 보면 굉장히 엉뚱한 지점에서 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상략) 정방(소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 사비성에 있던 백제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투항을 해 버린다. 투항한 백제인들이 걱정한 것은 당나라 군대의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당나라 군대가 철수한 이후의 사태였다. 이유야 어쨌든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가 피신한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멋대로 왕이 됐기 때문에 이는 반역에 해당한다.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당연합군에게 처리될 것이고, 성공해도 정치적 쿠데타에 협조한 혐의로 인해 문책을 당하게 되니 스스로 항복해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근본적인 원인은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피신했다는 데에 있다. 최고 집권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둘째 아들 태가 제멋대로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결국 의자왕 자신이 위기를 초래할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황산벌 전투에 투입된 백제군이 이른바 ‘결사대’가 아니었음을 사료를 통해 정확히 고증한다. 이처럼 저자는 역사학자들이 실추시킨 백제의 이미지를 자세히 살피며 올바른 역사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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