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제법 내공 있는 시인으로 평가 받는 A도 이 시 정도는 외우고 있었는지 기억을 가다듬는다 싶더니 곧 평정을 되찾아 반격에 나섰다. “아니지. ‘술의 노래’에서는 분명 그대, 즉 여자를 보고 한숨을 쉰다고 되어 있잖아. 그냥 술잔만 들고 한숨을 지은 건 아니라고.”

억지 같은 소리! 밀리면 안 되지 싶어 나도 바로 맞받았다. “무슨 말이야, 술잔을 들고 한숨을 짓는 건 매일반이지. 여자가 앞에 있든 없든.”

자기 전공분야가 시인데, 호락호락 물러설 A가 아니었다. “원, 녀석. 논리성 부족 하고는. 그게 어떻게 같나, 주체가 틀린데. 술잔을 들고 그냥 한숨짓는 것하고, 술잔을 든 채 여자를 보며 한숨을 쉬는 것하고는 대상과 무게, 이미지 자체가 다르잖아.” “니미, 다르긴 뭐가 다르다고 그래. 대머리가 민머리고, 민머리가 대머리지.”

이처럼 A와 내가 한숨타령으로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B가 끼어들었다. B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한데, 예이츠는 왜 여자를 보고 한숨을 지었대?”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B는 그 또한 ‘문청’ 기질이 만만찮았다. B의 시선은 자연히 시인인 A를 향하고 있었다.

“그거야 내가 알 수 없지. 나는 예이츠가 아니니까. 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서 애정이 식어가는 빛을 감지했다든가 배신의 기운을 느꼈다면, 그 참담한 심정의 여파로 한숨이 저절로 나오지 않았겠어?” A의 대답에 B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그럴 수도 있겠군. ‘사랑은 눈으로 든다’는 의미는 결국 사랑은 눈빛으로 느낄 수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반대의 감정 또한 충분히 눈빛으로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아내와 나 사이의 일을 떠올렸다. 나에 대한 아내의 눈빛은 언제부터 시큰둥해졌을까.
바로 이때 옆에 있던 C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도깨비 방아 찧는 소리하고 있네. 하여튼 네놈들은 현실적이지를 못해. 나이를 헛먹어서.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C의 느닷없는 발언에 A와 B, 그리고 나의 시선은 자연 C쪽으로 쏠렸다.

C는 비뇨기과 전문의였다. 자신에게로 친구들의 눈길이 집중되자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C는 말을 이었다. “왜 예이츠가 여자를 보고 한숨을 지었느냐? 아주 간단해. 성병 때문이야.”

뭐?! 우리는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C의 홍두깨 같은 주장에 우리 셋은 모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C는 태연했다. 자신의 판단이 당연히 사리에 맞고 현실적이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어보였다.
“틀림없어. 잘 알다시피 예이츠는 당대에 인기가 많았던 시인이야. 그러니 접근하는 여자도 꽤 있었겠지. 당연히 A놈 너처럼 적당하게 주지육림을 즐겼을 테고. 하지만 육림 속에는 어디 건강한 화초만 있었겠어. 화류계에서 놀던 병든 꽃도 있었을 건 뻔한 일! 그러다가 재수 없게 병에 걸린 거야. 그러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C의 기똥찬 논리에 우리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A가 그런 C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하여간 의사 놈들한테서는 형이상학을 기대할 수가 없어. 모든 생각이 병적이야. 그런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A가 나를 가리켰다. “한숨은 인생이 ‘해피’할 때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법이거든. 솔직히 말해봐. 너, 아까 왜 한숨을 쉰 거야? 분명 무슨 일이 있지?”

시인은 역시 감수성이 남다른 모양이다. 나는 A의 내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하품은 이유 없이 나올 수가 있어도 한숨은 그렇지 않다. 뭔가 고민이 있거나 일이 잘 안 풀리고 속이 답답할 때 나오는 것이다. 잠깐 망설이던 나는 흉허물이 없는 친구들 앞이니만큼 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나, 마누라랑 이혼했어.” 나는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다. 5년 전, 나는 형이 회사를 만들 때 보증을 선 일이 있었다. 형은 벤처기업 오너다. 사업이 잘 되었으면 좋으련만 ‘키코’ 사태와 근간의 불황으로 형 사업체는 부도 직전이었다. 회사가 파산하면 은행에서는 보증을 선 나한테 계고장을 날릴 게 뻔했다. 아내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 눈 번연히 뜨고 당하느니 방편상 재산을 몽땅 자기 이름으로 돌리고 이혼을 하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아내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법적으로 남남이 된 거라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A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B와 C도 어느새 얼굴이 흐려져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나는 아차 싶었다. 괜히 진실을 털어놓았다는 후회가 일었다.

‘그래, 기쁨은 모르는 사람과도 나눠 가질 수 있지만 불행은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함께 하기가 버거운 법이지.’

나는 재빨리 내 앞의 잔을 들었다. “자, 자, 괘념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뭐, 별일이야 있겠어. 작전상 그런 건데. 그러고 보니 예이츠의 ‘술의 노래’가 새삼 명시라는 생각이 드네. 우리가 알아야 할 거라고는 오직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는 진실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짐짓 이같이 너스레를 떨며 원샷을 한 나는 빈 잔을 머리 위에서 뒤집어 보이며 피에로처럼 웃었다.

그런데, 아내와 나는 과연 다시 합법적인 부부로 되돌아갈 날이 있을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