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 2주 사이 장효조 삼성 2군 감독과 최동원 한화 2군 감독의 연이은 타계소식을 접하면서 1970년대 고교야구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 또래의 50대 중반의 중년들에게 1970년대 고교야구는 꿈과 낭만과 무대였다. 던지고, 치고, 달리며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까까머리’ 고교야구 선수들의 진정성 있고 순수한 모습에 전국이 열광했다. 고교야구는 당시 최고의 스포츠 상품이었다.

전국대회가 열렸던 서울 동대문 야구장은 고교야구의 메카였다. 서울의 명문팀, 영호남과 충청도 등 전통의 강호들이 예측을 불허하는 명승부를 펼쳤고 이에 학생과 어른 관중들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각종 게임 등 많은 놀거리가 있던 때와 달랐던 그 시절, 고교야구는 학생들의 최대 볼거리였으며 물 설고 낯선 서울로 올라온 전국 고교동문들을 한데 모으는 감성의 ‘멜팅 포인트(melting point)’였다.

최동원과 장효조가 고교야구 선수로 맹활약할 때도 그 무렵이었다. 필자는 중학생으로서 고교야구 마니아였다. 중앙중 1년 때 처음으로 동대문 야구장에서 중앙고의 경기를 보면서 고교야구에 흠뻑 빠져들었다.

1972년 봉황대기 야구대회 결승에서 중앙고의 투수 겸 4번타자 윤몽룡이 만루홈런을 칠 때 흥분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교 형들의 야구 경기를 보는 것에 만족했던 것이 점차 전국의 명문팀으로 야구의 안목이 넓어져 갔다.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눈에 들어온 이가 바로 장효조이다. 보통 선수에 비해 키는 다소 작지만(1m74) 매섭게 휘두르는 방망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1973년 한일고교야구대회에서 ‘일본 야구에서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대형투수 에가와(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맞아 클린업 트리오인 3번타자를 맡았던 장효조는 1974년 대통령배 고교대회에서 5할을 때려 타격상을 받을 정도로 발군의 타격솜씨를 발휘했다. 치고 달리는 기동력의 야구도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강태정 감독이 이끌었던 대구상고는 장효조를 비롯해 선수 전원이 ‘히트 앤드 런’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기민한 전략을 펼쳐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장효조는 야구 소질에 관한 한 가히 천재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로 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배트를 갖다 대지 않으며 볼카운트가 불리하면 좋아하지 않는 볼은 파울볼로 걷어내면서 끝까지 승부하는 근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끈질긴 승부욕은 타율로 그대로 나타났다. 대구상고 3학년 때 4번의 고교야구대회를 통틀어 3할 8푼 3리를 기록했다. 10번 중 4번 안타를 기록한 셈이다. 당시로써는 초고교급 타자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필자와 58년 개띠로 동갑인 최동원은 경남고 시절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명투수였다. 고교 시절에는 직접 최동원의 경기를 직접 보지 못하고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접하다가 스포츠 신문 프로야구 담당기자가 된 1980년대 중반 프로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그를 직접 만났다. 워낙 유명한 선수였던 만큼 말과 행동을 아주 조심스럽게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군산상고의 홈런타자 김봉연(전 해태 타이거스)과 ‘도루왕’ 김일권(전 해태 타이거스 코치), 경남고의 교타자 김용희(전 롯데자이언츠 감독), 경북고의 괴물투수 황규봉과 이선희, 중앙고의 윤몽룡(전 OB베어스)과 유대성(전 포항제철) 등의 스타들이 화려하게 이름을 날렸다.

이들이 활약했던 동대문 야구장은 지금과 비교하면 시설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시설이 열악했고 서비스도 엉망이었다. 스탠드는 시멘트 바닥 그대로여서 무더운 한여름에 경기를 볼라 치면 그야말로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스탠드의 복사열과 관중들에게서 뿜어지는 열기가 더해져 야구장 전체가 후끈후끈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동대문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며 재미있게 보냈던 일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고교야구의 전성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는 게 무엇보다 안타깝다. 1990년대 윤몽룡이 백혈병으로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먼저 떠났고 장효조가 55세를 일기로 지난주 타계했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한창 나이에 둘이 요절했다. 필자와 갑장인 최동원도 10년 야인생활 속에서 마음의 병이 깊었던 듯 아까운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떴다.

한때 많은 이들에게 낭만과 즐거움을 주었던 1970년대 고교야구스타들이 사라지면서 추억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970년대 그 뜨거웠던 고교야구의 열기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로 인해 점차 기억마저 희미해져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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