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노인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10분쯤 뒤였다. 노인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내 입에서는 저절로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오늘은 좀 늦었습니다 그려.”

물론 영어였다. 말을 해놓고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저 노인이 어찌 영어를 알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TV 뉴스를 보다가 분통이 터져 화를 좀 삭이느라 늦었소.”

노인의 영어는 유창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발음이 좀 딱딱할 뿐 문장은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이다.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댁은 어디서 오셨수?”

나는 한국인이며, 친구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노인은 내가 보고 있던 영자 신문을 일별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를 열심히 보시던데, 하면, 이번 재판에 대한 당신 생각은 어떻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 의견을 피력했다. 현 정권의 권력층 또한 예전에 크메르루주 당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결코 전범들의 단죄가 쉽지 않을 거라고. 내 말에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대로 보았소. 필경 흐지부지되고 말 거요.” 노인의 얼굴에는 괴로움과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순간, 내 눈에는 노인의 의수와 그 고통스런 표정이 겹쳐졌다. 더불어 어쩌면 그도 킬링필드와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나는 내 직감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영어도 유창하시고, 상당한 지식인이신 것 같은데… 폴 포트 정권의 학살 만행을 용케도 피하신 모양입니다 그려.” 진정한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만든답시고 지식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당시의 상황을 나는 넌지시 언급했다. 이를테면 미끼 말을 던진 셈이다. 그런 나를 노인은 일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75~79년 사이니 내가 얼추 당신 나이쯤 되었을까, 당시 폴 포트 정권은 정말이지 지식인들의 씨를 말렸지. 내가 살아남은 것은… 폴 포트의 은전 때문이라오.” 나는 노인의 고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쭙잖은 미끼로 그야말로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나는 폴 포트의 오른팔로 불리던 최측근 참모였다오. 최고위원 12명 중의 한 명이기도 했고. 파리 유학 시절, 폴 포트는 나와 가장 가까웠던 대학 동창이었지. 하지만 나는 지식인을 모조리 쓸어버리려 하는 최고회의 의견에는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오. 왜냐하면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인력은 필수적인데, 우수한 두뇌를 모조리 없애는 건 기반 동력을 말살시키는 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자 다른 최고위원들이 노인을 가만두지 않았단다. 악질 부르주아 사상에 물들었다는 비판과 함께 그를 변질자로 몰았던 것이다. “특히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이 나를 가차 없이 씹었지.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려는 마당에 나와 같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예 싹부터 잘라버려야 한다고 말이야.” 이때 그들의 타깃이 된 게 바로 노인의 ‘하얀 손’이라고 했다. 당시 노인의 손은 여자처럼 유난히 희고 깨끗했는데, 그걸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이 공격했다는 것이다. 저런 ‘백수’가 어찌 노동의 신성함을 알겠느냐고 말이다. 희한한 것은 그들 또한 다 외국 물을 먹은 지식인이었지만 손만은 모두 시꺼멓고 거칠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폴 포트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유학할 때 고락을 함께한 동지라는 이유로 노인을 두둔할 수만은 없었던 까닭이다. 결국 노인은 숙청 대상이 되고 말았는데, 간신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폴 포트의 배려 때문이었다. 물론 대가는 지불했다. 처형을 않는 대신 한쪽 손을 자른다는 조건이었으니까.

“그 이후로 지식인을 구별하는 목록에 손이 하얀 사람까지 첨가되고 말았지. 나를 모델로 삼아. 세상에, 손이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되우?”

노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 또한 노인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저녁 P가 돌아왔다.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한 듯 그는 약간 지쳐 보였다. “그래, 투자할 명당자리는 확보한 거야?” 나의 물음에 P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군침이 도는 곳이 있긴 한데, 외국인에 대한 투자 조건이 만만치가 않아. 물론 고위층과의 커넥션이 있으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나야 이 나라에 무슨 끈이 있어야 말이지.” 말과 함께 P는 입맛을 다시며 못내 아쉬워했다.

“내 일은 그렇다 치고,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혼자 심심하지는 않았어?” 심심하기는. 나는 이 휴양지에서 묵은 것이 내 일생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시간이었음을 다소 과장되게 떠벌렸으며, 그게 또한 다 ‘네 덕분’이란 아부성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아, 그리고 우연히 어떤 노인을 알게 되었는데 말씀이야….” 이러면서 나는 노인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흰 손’ 사건을 상세하게. 그러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P가 돌연 무릎을 탁 쳤다.

“맞아, 어쩌면 그 노인이 내 끈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네.”

나는 P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영문을 몰라, 웬 끈? 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녀석이 덧붙였다. “그 노인이 옛날 폴 포트의 오른팔이었다며. 그렇다면 현재의 권력층과 당연히 줄이 닿는 사이가 아니겠어? 예전에는 모두 한솥밥을 먹은 크메르루주 핵심당원이었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말하며 P는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그런 P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얼마나 기찬 순발력이고 머리 회전인가!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사업가 발바닥도 못 따라간다니깐.’ 속으로 이같이 감탄을 한 나는 새삼 P를 달리 평가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손은 무쇠솥뚜껑처럼 거무튀튀했고 내 손은 새색시처럼 희디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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