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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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강한 저항을 받고 있고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가 이어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국정연설에서 러시아를 철저히 응징하겠으며 나토 동맹의 영토를 1인치까지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절한 저항을 칭송하면서도 그들이 겪고 있는 재앙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번 바이든의 연설에 대해 우크라이나 측은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우스티노바 의원은 러시아의 거대한 석유·가스 산업을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제재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공중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비행금지구역’의 설정이 절실하다고 했다. 이어 나토 회원국들의 경제 제재와 군사 원조를 넘어 미국으로 하여금 개입을 강화하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에너지 산업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제재를 취하면 글로벌 에너지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져 미국 소비자들에게 충격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우스티노바 의원은 미국인들은 휘발유 1갤런에 20~30센트를 더 지출하게 될 뿐이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계속 목숨을 잃게 된다고 개탄했다. 그리고 미국이 ‘비행금지구역’을 시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러시아군과 직접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군의 진격이 부진하고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가 ‘공공의 적’이 돼 버린 상황에 고무된 미국은 러시아 때리기에만 열을 올릴 뿐이고 직접적인 군사적인 개입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제재조차도 미국에 리스크가 있는 경우에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도적 재앙에 대해서도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러시아를 악마화하기 위해 여론전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 이전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주권 보존을 약속했는데 러시아가 침공해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유린되고 민간인들의 피해가 늘어만 가고 있는데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 있나? 러시아의 급소를 피해 가는 제재만으로도 러시아에 고통을 줘 러시아가 스스로 철군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인가? 역사가 보여 준 러시아인들의 기질로 보아 미국의 그러한 기대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유엔난민기구는 러시아의 침공이 멈추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 난민이 1000만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내다보면서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최대 난민 위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부담은 동유럽 국가들이 모두 떠맡고 있지 않은가? 미국은 민주주의, 인권과 인도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나라인데 우크라이나 난민의 발생은 대서양 너머 먼 나라의 일인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포위된 상태에서 유럽연합 회원국 지도자들에게 나토 가입을 요청했으나 이에 동의한 나라는 없었다고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가입이 가까운 장래에 성사되는 것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왜 미국과 나토는 이른바 ‘open door policy’를 내세우며 그간 러시아의 안전보장 요구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계속 갖고 있었기 때문인가? 미국은 러시아 측에서 침공 의사가 없다고 할 때마다 이를 반박했고 심지어 침공 일시까지 제시하지 않았던가? 러시아의 침공이 시간 문제라고 확신했다면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 엄청난 인도적 참사가 일어날 것도 당연히 예견했을 텐데 러시아에 대해 제재 카드를 흔드는 것 말고 어떤 대비를 했는가?

21세기에 주권국가를 짓밟는 무력공격을 자행한 러시아의 행동은 명백히 국제법상 ‘침략’이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러시아는 그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미국은 군사적 옵션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러시아가 대가를 치르게 하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통을 하루바삐 종식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즉, 우크라이나 정부에만 맡겨 놓지 말고 러시아와 직접 대화해 러시아에 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즉시 철군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고 본다. 끝으로 이번 사태를 보며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 고려하는 분권적 국제사회에서는 타국이 넘보지 못할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그런 나라를 만들려면 자강 노력에 더해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동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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