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추석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수확과 결실의 풍요로움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또한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서 가족애를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추석은 그리 녹록지 않다. 평소 삶의 무게에 지친 나머지 푸념과 넋두리를 늘어놓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사회적 관점을 얘기하다 보면, 가족애가 아니라 ‘가족원(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무엇이 명절기간 동안 가족 재회의 즐거움이 아니라 가족 간 갈등을 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서로 다른 과정의 삶을 살다 보니, 비록 형제‧자매간이라도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의 문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여러 가지 공과 및 자살 사건에 대한 평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노동 현안 문제, 한진중공업 사태 문제, 제주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에 대한 견해 등 실타래같이 얽히고설킨 문제 등이 토론거리로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싸움이 벌어지는 것에 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 가족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아들은 역으로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가족이 똑같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렬하다. 이러한 소망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갈등이 유독 추석 명절 때 불거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가족 역동의 변화’에도 있다.

‘가족 역동(Family Dynamic)’이란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이 심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역동이란 아버지가 가부장이 되어서 다른 가족들을 지배하면서 통제하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자녀들의 양육에 헌신하며,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분위기가 민주화되었고,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산업 구조가 변화되면서 전통적인 가족 역동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분화되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 역동들이 존재하므로 한국사회의 전형을 말하기가 어렵다. 여하튼 명절 때에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가족 역동과 기존에 형성되었던 추억의 가족 역동 간에 충돌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공부를 못했던 그래서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았던 셋째 아들이 이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명절 기간 동안 우쭐한 마음에 큰소리를 치려고 하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부족한 사람 취급을 하려 한다면 갈등과 충돌은 필연적이다. 명절 때 가족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가장 좋은 주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들에 대해서 함께 기억을 되살리며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각자의 모습이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인정하라. 어릴 적 한 부모 밑에서 자랐을 때도 서로 생각이 틀려서 티격태격했을진대 이제 오랫동안 떨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명절 때 잠깐 만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무리임을 인정하라. 가족 간에 대화를 나눌 때 절대로 비난하거나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 형의 강력한 의견 피력이 동생에게는 어릴 적 자신을 힘으로 밀어붙였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킬 수 있고, 동생의 반론 제기가 형에게는 어릴 적 자신에게 끝까지 대들어서 결국 몸싸움까지 했던 반항적인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킬 수 있다. 말하는 내용과 합리성보다 때론 그 밑에 흐르는 감정적인 교류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태도나 몸짓, 표정 등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가족 간에 더욱 강력하게 감지된다.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배려하고 주의하라. 그래야 ‘가족애’가 지켜진다. 지금은 가족끼리 365일 서로 가깝게 지내는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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