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몽드가 ‘한국인(Les Coreens)’이란 책을 펴낸 前 주한 프랑스 외교관 파스칼 다예즈-뷔르종을 소개하는 서평기사에서 “프랑스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한국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한국에 걸맞은 위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가 내 눈길을 끌고 있다.

왜 저자는 한국을 몰이해 하는 나라에 대해 소개하면서 하필이면 이웃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들었을까.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우선은 우리 자신부터 우리에 대해 이해를 못 하고 있고, 나아가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이 참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우리는 그야말로 우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해도 어색하지 않으나, 중국과 일본은 애써 한국을 이해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세계의 힘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이(轉移)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중‧일’ 삼국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이 세 나라는 도래할 세계의 중심국과 패권국이 되고자 각축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이 같은 현실을 저자는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국인 프랑스 역시 중국과 일본과 같은 입장이 되지 말자고 경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뷔르종이 보는 관점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뷔르종의 견해에 필자는 더 신랄하게 입장을 밝혀보기로 했다.

먼저 중국의 현실부터 알아보자. 중국은 자본주의가 싫어서 사회주의를 택한 나라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의 한계성을 느낀 중국은 다시 자본주의를 인정했다. 그 결과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심각한 빈부격차가 발생했다. 심각한 빈부격차는 사회문제가 되고, 그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장개석 등소평 장택민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30년이 흘러온 지금, 중국은 깊은 딜레마에 빠진 게 사실이다. 빈부격차는 비단 오늘날 중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중국은 우리 입장과는 사뭇 다른 게 ‘격차 없이 다같이 잘살자’는 슬로건 하에 사회주의를 고수한 자본주의를 외쳐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현상은 중산층이 없는 극도의 빈부격차로 이어지므로 체제의 존립마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심각한 고민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 있다. 55개 소수민족이 다른 피, 다른 문화로 억지로 하나 된 나라라는 점 또한 불씨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 티베트 위구르 몽골은 언제 분리 독립을 외치고 나올지 모를 화약고이며, 그 화약고를 중국은 껴안고 있다.

그뿐이겠는가. 무역적자와 함께 미국과의 위엔화 환율 전쟁은 경제문제를 넘어 정치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현실이며, 중동의 재스민 혁명의 기운은 아직 중국 공안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또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영토분쟁은 일본과의 문제를 넘어 태평양을 주도하는 미국과의 대립으로 확대됨으로 결국 중국은 일본이 아닌 미국과 군비경쟁을 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자초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중국은 힘들다고 수수방관하고 있지는 않으며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이 진정 고민하고 있는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이며 한국과의 관계다. 한국(민)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확립되는 날 중국은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초조함과 위기의식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볼 때 중국의 꿈은 애초부터 망상에 지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이 같은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택한 ‘동북공정’과 같은 해결책들은 급기야 자충수가 되어 부메랑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란 점을 깊이 깨달아 사실과 현실에 맞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갈 것을 이참에 주문해 본다.

일본 역시 아시아의 패권 나아가 세계의 패권, 그 꿈은 꿀 수 있겠으나 이룰 수 없는 꿈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일본열도는 지난 지진과 쓰나미로 2cm나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앞으로 일본열도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중심국은 100여 년 전 인도의 성인 타골이 예찬한 동방의 등불의 나라 바로 ‘코리아’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 뷔르종 역시 이 같은 역사적 또는 현실적 근거에 기초해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단순한 이미지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지금 ‘한류’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아시아 미국은 물론 전 유럽을 강타하고 있다”고 한국을 예찬하며 “미래는 한국의 것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넘어 확언했다는 사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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