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1996년 4월 8일 학교에서 퇴근하여 병원을 들러서 늦게 집에 들어오니 내자가 쪽지를 내주면서 제자의 전화번호이니 전화를 걸어 보란다. 쪽지를 펴보니 김인식이라는 제자였다. 반갑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하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더니 전화를 받는다.

“여기 서울” 하니까 벌써 알고 “아, 선생님이세요. 저 인식이에요. 저 기억하시지요?”
“글쎄 이름은 확실히 기억나는데 얼굴은 확실하게 떠오르지를 않는구먼. 키가 아주 큰 편은 아니었고 아마 산수리 쪽에서 살았었지.”
“아니에요. 신정리에서 살았어요. 선생님 섭섭하네요. 홍수예는 아시면서 인식이는 모르시고.”
“아니야 인식이도 기억나.” 미안한 생각에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홍수예를 만났다면서요.”
“아니야 홍수예를 만난 지가 15년이 넘었을 거야.” 15년 전에 한번 만난 뒤에 소식이 끊어지고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는 터였다.
“수예와는 연락이 되나.” “그간 연락이 안 되다가 며칠 전에 만났어요. 선생님을 같이 찾아뵙기로 했어요. 선생님 조윤선이 아시죠. 윤선이도 며칠 전에 전화 통화했는데 선생님 보고싶대요.”
“조윤선이라 시장에서 식당을 하던 집 딸이지.”
“예, 맞아요.” “수예는 출가했나?”
“아직 안 했어요. 아직 미혼으로 있으면서 은평보건소에 근무하고 있어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냥 있나?”
“저희들 나이가 39. 40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중학생 학부형이 되었겠네.”
“국민학교 학부형도 있지만 일찍 결혼한 사람은 고등학생 학부형도 있어요.”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나.”
“화살 같은 세월이라고 하지 않나요.”
“고등학교 원서 쓸 적에 고등학교 어디 가느냐고 하셔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 한다고 했더니 그 다음 날 자전거 타고 우리집에 즉시 오셔서 아버지와 2시간을 담판하셔서 허락을 얻어내고 원서를 써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랬었나?” 사실 나는 그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겠다는 학생 집은 전부 가정방문을 하여 진학시킬 것을 권고하였고 그 결과 여러 명을 진학하도록 하게 했다.

“선생님 덕분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남편을 만나서 잘 살고 있어요. 남편에게 선생님 말씀을 드렸더니 훌륭하신 분이라고 하면서 꼭 찾아뵈라고 하더군요. 선생님 뵙고 싶어서 10년 이상을 찾았어요. 교육청에도 여러 번 알아보고 해미중학교에도 알아봤으나 찾을 길이 없었어요.

작년에도 해미중학교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학교 출신이 서무과에 근무하기에 남균우 선생님을 찾을 수 있느냐고 부탁했더니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 테니 찾아보자고 하여 기다렸어요. 소식이 없기에 전화를 걸어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못 찾았다고 하여 실망을 했어요. 교육청에도 다시 부탁을 했더니 처음에는 왜 찾으려고 하느냐고 의심하면서 안 일러주었어요. 은사님인데 찾아뵙고 싶다고 했더니 기다리라고 하여 기다렸더니 역시 못 찾았어요.

요사이 방영되는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를 보면 선생님 생각이 더 간절했어요. 이 세상에서 저희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 말고요. 제일 존경하고 뵙고 싶었던 분이 선생님이에요. 그래서 십수 년 동안 찾았어요.”
“정말 고맙네. 나를 잊지 않고 찾았다니 20여 년 전에 졸업한 후 전혀 소식이 없어 나도 퍽 보고 싶었는데, 고맙고 반가워.” “그럼 며칠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 후 전화가 또 걸려왔다. 받아보니 김인식의 전화였다. 친구들에게 선생님과 통화한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반가워했다는 이야기와 4월 20일 토요일에 동창회를 하기로 하였으니 그때 모시자고들 하였으니 오실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군들만 좋다면 나야말로 천만리라도 뛰어가서 만나고 싶은데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