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거울은 사람의 생활필수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만약 거울이 없으면 맑은 물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야 말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사람을 거울로 쓴다. 다른 사람의 관찰과 평가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람은 이 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도 비추어 본다. 왜 사람은 거울을 보는가.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정확한 자기 확인과 자기 점검, 자기 준비와 자기 개선을 위해서다. 그런 목적이라면 우리가 당면한 시대상과 국가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다. 그런 거울 어디에 없는가.

윤동주는 달이 비치고 구름이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의 얼굴을 비추어준 거울은 어느 외딴 우물이었다. ‘자화상’이라는 그의 시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다.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홀로 찾아가선/ 조용히 들여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글귀가 말해주듯이 윤동주가 우물 속에 비추어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은 피상적인 이미지(Image)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였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눈은 시력을 투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을 ‘수단’으로 빌리되 영안(靈眼)과 심안(心眼)을 동원해야 내면의 실체에 대한 투시가 가능할 것이다. 윤동주는 바로 그 같은 영의 눈, 마음의 눈으로 두 번씩이나 돌아섰다 생각을 바꾸어 되풀이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본래 그대로의 자신의 ‘참 실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미(美)외 추(醜), 애(愛)와 증(憎)의 테제(These)와 안티테제(Anti-these)가 대립하다가 신테제(Synthese)로 지양(止揚, Aufheben)돼 ‘종합’되는 헤겔의 변증법을 감상하는 것 같다. 이것이 거울의 진가다. 거울처럼 얼굴을 비추어주는 ‘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나라가 혼란해서야 나라를 비추는 거울이 있은들 우리가 그것을 들여다 볼 겨를이나 있을까. 차분하게 영의 눈,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실체적 진면목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정권의 향방이 걸린 총선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갑자기 ‘관련 세력’들이 규합되고 발호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 현장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현장에서의 그들의 조직적이고 잘 기획된 역동적인 ‘활약’은 빛이 났다. 세력은 더욱 커지고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활약’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인가. 우리 영토에 우리가 필요한 군사기지를 못 만든다면 어디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군사 기지를 만들란 말인가. 남의 나라 땅인가. 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라며 해군기지 건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데 도대체 이 지구상에 힘이 없고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게 물리력으로 덤벼든다고 농성은 해결되는 것인가. 아무튼 그들의 기세는 정부와 공권력의 대처 능력을 압도하는 것 같다. 그 빌미는 ‘불’을 끌 타이밍을 놓친 정부의 방심과 실기(失機)에서 비롯됐을 뿐 아니라 정치에 실망한 민심의 이반이 제공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당면한 이 같은 혼란상은 거울에 비추어보나 마나 더 부강한 나라로 가는 과정의 진통이나 사회의 활력(Dynamics)이라고 보려야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눈들이 너무 무섭게 핏발이 서 있다. 윤동주와 같은 영의 눈, 마음의 눈은 고사하고 그렇다는 것만이라도 읽어내주기를 기대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은가. 바로 이럴 때 거울은 아무리 맑고 밝아도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된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거울에도 비추어 보지만 자화상을 그려서도 본다.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찍어내는 사진과도 다르다. 렘브렌트 반고흐 고갱 베르나르 조선조 때 어부사시사를 쓴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尹斗緖)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성찰하기 위해 그린다. 이를 통해 윤동주의 변증법적인 ‘자기 지양’을 이루어내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렘브렌트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일그러진 자기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늙어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를 실행하는 값진 노력 아닌가. 그렇다면 거울이든 거울 같은 물이든 자화상이든 우리 모습을 어디에든지 자주 비추어 보는 것이 어떤가. 나라를 망가뜨릴 요량이 아니라면 플라톤이 말한 대로 꼭 남을 제압하고 우월한 위치를 점해 인정받으려는 욕망, 이른바 ‘메갈로타이미어(Megalothymia)’만을 발동하는 막가는 싸움이 아니라 좀 차분해지고 이성적이며 책임을 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

거울은 자칫 보기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반해 터무니없는 자아도취나 혹여 반대로 자기 환멸이나 절망에 사람을 빠뜨리게도 한다. 예컨대 흔히 듣는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美少年) 나르키서스(Narcissus)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호랑이가 담배 피웠다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나머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렇게 죽어서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나르키서스, 곧 수선화(水仙花;Narcissus)로 피어났다. 이때의 거울은 자기 환멸이나 절망을 안겨줄 때처럼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액물(厄物)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삐딱하게 판독한 사람의 탓이지 거울 탓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우리는 윤동주처럼 우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거나 렘브렌트처럼 자화상을 그려서라도 자신과 나라의 모습을 자주 거기에 비추어 들여다본들 손해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