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육상이라고 달리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던지고 뛰기도 한다. 여기다 걷는 것까지 있다. 지난 주말 국내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린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경보경기를 TV로 보면서 오래전 큰아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23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당시 2살이던 아들은 거실에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TV에서 생중계하는 경보경기를 보았다. 선수들이 오리궁뎅이 자세로 뒤뚱뒤뚱 걸어가는 것이 재미가 있었던 듯 연방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동작과 행동이 워낙 특별하니 가치판단을 하기도 어려웠을 아이에게는 마냥 신기하고 우스꽝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당시 스포츠 기자를 하고 있던 때라 아들로 인해 경보에 대해 깊이 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즈의 시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처럼 천성적으로 때 묻지 않은 모습을 경보를 통해 아이에게서 찾았던 것 같다.

사실 경보는 보는 이는 웃지만 선수들은 피눈물 나는 대표적인 종목이다. 경보 선수들이 이처럼 걷는 것은 까다로운 경기규칙 때문이다. 두 발이 동시에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되며 땅에 닿은 다리의 무릎관절은 한순간 똑바로 뻗어야 한다. 얼른 보아서는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심판진의 매서운 눈매는 위반 선수를 족집게처럼 찍어낸다. 경보경기는 말 그대로 육상 종목에서 대표적인 걷기 종목이다. 인간의 달리고 싶은 원초적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경보경기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는 원시시대 사냥의 흔적이다. 산 넘고 달리고(육상) 물 건너며(수영) 사냥감을 쫓다가 마침내 먹잇감이 지치면 화살을 쏘거나(사격, 양궁) 직접 격투(레슬링, 복싱)로 잡는다. 200만 년 전 나무에서 내려온 인류는 사냥감을 찾아 스포츠로 여러 가지 신체 능력을 키웠다.

스포츠의 고장 영국에서 17세기와 18세기 초기에 걸쳐 주로 경주와 경보의 형태로 육상경기가 펼쳐졌는데 특히 경보는 정확한 걸음걸이로 얼마나 빨리 걷느냐는 것을 겨루는 대표적인 종목이었다. 인간에게 걷는 것은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일이며 이를 스포츠를 통해 구현한 것이 경보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 식대로 표현하면 10리(4km)를 한 시간에 걷는다. 이에 반해 경보 선수들은 일반인보다 배는 빠르다. 허리의 힘을 최대한 이용, 한 뼘이라도 더 앞으로 발을 내딛기 때문에 보폭이 크고 템포가 빠른 것이 경보 선수의 특징이다.

다른 육상경기, 특히 마라톤보다 경보가 더 힘들다. 그 이유는 마라톤은 뛰는 경기라 그때그때 반발력을 이용할 수 있지만 경보는 발을 땅에서 완전히 뗄 수가 없어 순전히 발의 힘만으로 전진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곱절이나 더 든다. 따라서 경보 선수들은 허리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무릎을 쭉 뻗어서 땅을 딛기 때문에 무릎부상도 아주 많다.

이처럼 엄청난 운동량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경보는 그간 한국육상에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여건이 안 좋은 육상 중에서도 경보는 특히나 관심 밖의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구 세계육상대회에서 모처럼 세계의 높은 벽에 도전할 만한 재목이 등장해 육상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주인공은 김현섭이었다. 삼성전자 소속으로 26세인 김현섭은 남자 경보 20km에서 1시간21분17초를 기록하며 세계 6위를 차지했다. 찜통 더위의 악조건 속에서 질긴 투혼을 발휘한 김현섭은 결승선을 골인한 뒤 탈진, 들것에 실려나간 뒤 응급조치를 받고 깨어나기도 했다. 김현섭은 비록 자신의 기록이자 한국신기록인 1시간 19분31초를 깨지는 못했지만 당초 목표로 했던 세계10위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선수단 중 최초의 세계 톱텐 진입이었다.

김현섭의 성적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바로 오늘날 한국육상의 현주소와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보를 보며 관중들은 웃지만 선수들은 피눈물 나는 경기력을 발휘한다. 그동안 마라톤을 빼고는 세계 수준에 너무나 뒤떨어져 웃음거리까지 됐지만 뼈를 깎는 고통을 이기며 노력을 한다면 한국육상의 미래도 결코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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