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몸은 궁지에 몰려 있어도 그의 광기만은 아방궁에서와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처지가 영락없이 독 안에 갇힌 쥐임에도 카다피는 자신을 쫓는 반군(叛軍)들을 ‘쥐’와 ‘바퀴벌레’라고 했다.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서도 그는 용케 녹음된 목소리만은 바깥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필사적인 광기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쥐’와 ‘바퀴벌레’와 같은 반군의 무리들에 맞서 국민들은 총을 들고 길거리로 나와 그들과 싸우라”. 하지만 아무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그는 권력의 아방궁을 떠난 권력의 미아(迷兒)다. 동시에 국민들로부터 버려진 권력의 탕자(蕩子)다. 그런 그의 외침에 국민들로부터 열화 같은 화답(和答)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옛 영화(榮華)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왜 순한 양떼 같았던 국민이 ‘길거리로 나와 싸우라’는 자신의 지엄한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는지 그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국민이 한때 순한 양떼 같았을망정 그것은 카다피 자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늑대 같던 자신의 권력이 무서워 그의 손가락과 몽둥이가 가리키는 대로 움직였다는 것을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미 자신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국민들을 향해 총을 들고 나와 반군과 맞서 싸워라 마라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국민들더러 피를 더 흘리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인가. 독재자의 광기가 아니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카다피가 자신을 쫓는 반군들을 가리켜 쥐나 바퀴벌레라 한 것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 보인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독재자들이 소지하는 잔인한 심성과 광기를 솔직하게 잘 대변해주었다. 독재자들의 눈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리가 만무하다. 그들의 광기 앞에 지지자이거나 반대자이거나를 가릴 것 없이 ‘인격체’로 인정받는 존엄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오로지 그들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권력의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이 같은 광기의 독재자가 오고갈 때 사람을 사람으로 안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학살과 숙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피의 땅(Blood lands)’을 쓴 티모시 스나이더(Timothy Snider)에 따르면 히틀러와 스탈린이 인종청소나 반혁명분자로 몰아 죽인 사람의 숫자가 자그마치 1400만 명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스탈린은 1930년대 초반 농업 집단화(Collectivization) 정책을 추진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그 때문에 소련에는 대 기근(饑饉)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그 같은 분명한 자신의 실책을 농민 탓으로 돌려 우크라이나인들을 중심으로 대략 5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다. 농민을 굶겨 죽임으로서 자신은 ‘면피(免避)’를 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과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곤 했으며 그러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그 같은 잔학한 짓을 계속해야 했다.

사람 목숨은 허망하고도 질긴 것이어서 그 참혹한 아사(餓死) 작전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을 스탈린은 강제노동수용소(굴락, Gulag)에 보내기도 하고 쏘아 죽이기도 했다. 수용소가 포화상태이면 쏘아 죽였다. 그는 이것도 모자라 전국적으로 이른바 ‘번영하는 부농(쿨락, Kulak)’을 색출해 살던 곳으로부터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로 추방하거나 강제수용소 ‘굴락’에 가두었다. 말이 부농이지 그 부농 ‘쿨락’의 딱지는 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씌운, 말하자면 ‘혐의를 위한 혐의’였다. 그는 그들이 반혁명 성분을 가졌으며 독일의 파시스트나 일제(日帝)와 내통하는 스파이 짓을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제 식민통치 시기인 1937년 17만여 명에 달하는 극동의 한국 동포들이 동시베리아에서 저 먼 오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보면 스탈린은 언필칭(言必稱)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이며 자신의 권력 기반인 농민과 노동자 계급에게 그가 약속한 지상 낙원, 유토피아(Utopia)를 선물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대상으로 대학살극의 불행이나 안겨준 것이 된다. 카다피가 말한 녹색 혁명이든 스탈린의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든 인민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혁명의 말로와 실체가 대충 이렇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은 철저하고 조직적인 기획에 의한 대학살극을 정치에 이용한 최초의 독재자다. 히틀러는 스탈린으로부터 그 수법을 배웠다. 광기의 이 두 독재자는 대학살과 숙청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가면서 피차 서로에게 명분과 핑계가 돼주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의 위협론을, 히틀러는 반대로 막시스트(Marxist) 스탈린의 위협론을 단골 메뉴로 활용했다. 그 둘은 1939년 독-소(獨-蘇)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동맹으로 서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이때 두 나라는 함께 폴란드를 침공해 약속이나 한 듯이 이에 저항하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2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독일과 소련의 수용소로 보냈다. 하지만 히틀러는 2년 뒤인 1941년 그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그는 오스만 제국 해군 제독의 이름을 딴 작전명 ‘바르바로싸(Barbrossa)’의 전격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 이내 레닌그라드를 포위한다. 이에 레닌그라드 시민 1백만 명과 소련군 포로 3백만 명이 아사했다. 물론 히틀러의 의도적인 아사 작전이었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에는 실패했지만 유태인 멸절(Extermination) 계획만은 집요하게 밀고 나갔다. 그는 살인 기술과 도구로 일산화탄소(Carbon monoxide)에 의한 질식사나 시안화수소(Hydrogen cyanide)에 의한 가스 중독사를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유태인 600여만 명을 아우슈비츠 소보비르 벨젝 트레블링카 등지의 살인 공장에서 죽였다. 이 같은 죄를 짓고도 스탈린은 끝까지 권력을 잔인하게 전횡하다가 권력을 안고 갔다. 히틀러는 더 말할 것 없이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 자살했다. 이들이 저승에서 그 죄 값을 치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을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보냈다. 이들 같은 광기의 잔학한 독재자들에게는 그 죗값을 반드시 이승에서 치르도록 해 카다피와 같은 광기의 독버섯이 뒤를 이어 돋아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광기의 독재를 부르고 독재자들을 키우는 것은 독재자들의 포퓰리즘적 선동 선전에 현혹되기 쉬운 민중의 무지와 우매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 같다. 아무튼 카다피의 몰락으로 잔인한 광기의 독재 역사도 함께 끝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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