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수능을 치러본 입시생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수능점수는 말입니다, 다분히 그날 운이에요, 운. 운팔기이(運八技二) 쯤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또 어떤 재수생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체력도 상당한 변수예요. 여름방학이 끝나 2학기로 접어들면 결국 지구력 싸움이 되거든요.”

나는 대학 1학년이다. 지난해 수능시험에서 전 과목 1등급을 받아 국내 최고의 명문대학 정시모집에 당당히 합격했다. 운과 체력이 좋았던 모양이라고? 뭐, 그렇게 얘기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한테는 아주 특별한 ‘도우미’가 분명 따로 있었다. 그게 뭔지 궁금하다고?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침식사가 학습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농촌진흥청이 약 3700명의 대학 신입생을 상대로 아침식사와 수능성적 간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매일 아침을 먹었다’라고 응답한 학생들의 평균 수능성적이 ‘먹지 않았다’고 대답한 학생들의 성적보다 평균 5%나 높았단다. 점수로 따지면 약 20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침에 겨우 일어난 수험생들은 대부분 입맛이 없다. 밤늦도록 학원과 과외에 시달리다 보면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피로 등으로 지쳐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입시생 때 그랬다. 한동안은 아침을 굶고 다니다시피 했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 제사가 있던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엄마는 간밤의 제사 음식으로 푸짐한 아침상을 차려주었지만 나는 식욕이 전혀 일지 않았다. 진수성찬이 꼭 남의 밥상 같았다. 내가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자 엄마가 혀를 끌끌 찼다.

“조금이라도 먹어라. 체력이 실력이라는데 먹어야 힘이 생길 것 아니니.” 엄마는 수험생 아들이 밥을 한술이라도 뜨기를 바랐지만 나는 기어이 그냥 일어나버렸다. 입안이 깔깔했던 나는 그저 주스나 한잔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엄마의 간절한 시선이 안타까웠지만 식탁을 뒤로 한 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때 내 눈에 띈 것이 막걸리 병이었다. 어젯밤 제사상에 올리고 남은 술이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무척 좋아하셨다. 밥맛이 없을 때면 끼니를 종종 막걸리 한 사발로 때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막걸리는 밥과 똑같은 기라. 고두밥과 누룩으로 만드니께. 영양가도 나무랄 데가 없제. 하여간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다 아는 기라. 논밭에서 힘든 일을 할 적이면 막걸리가 최고의 밥이요 참이며 음료수라는 사실을.”

예전에 할아버지가 곧잘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주스 대신 막걸리를 한 컵 가득 부었다. 마치 들일을 하다 시장기를 느낀 농사꾼처럼. 그러고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들이켰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막걸리인데도 목 넘김이 나쁘지 않았다. 독하지도 않고 달착지근한 것이 마실 만했다. 꼭 내 몸은 선천적으로 막걸리가 잘 받는 체질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내가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나는 빈 컵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입안에 남은 여운이 꼭 즙 많은 복숭아를 먹고 난 뒤끝 같았다.

무슨 조화로 나는 막걸리를 마신 후 혀끝에서 복숭아의 향기를 느꼈던 것일까. 그 바람에 나는 자신이 마치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손오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어 혼자 비시시 웃었다.

아무렴 막걸리를 천도복숭아에 견주다니! 터무니없는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즐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수밀도 즙같이 탁하고도 달착지근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위로 흘러들자 나는 대번에 속이 뜨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고3’이 되고부터 생겨난 초조한 기분이 아주 느긋해지고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노상 그러셨잖아, 막걸리는 마시는 밥과 같다고. 정말 먹어보니 괜찮네. 맛도 좋고 배도 부르고.”

모처럼 쫓기는 기분에서 해방된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엄마는 입을 딱 벌렸다. 사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하면, 체질과 기호 또한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것일까.

아무튼 그날, 나는 컨디션이 아주 그만이었다. 굶거나 주스를 마시고 등교했을 때보다 속이 훨씬 든든했으며 몸도 가뿐하게 여겨졌다. 속이 뜨뜻해지니까 일단 몸이 훈훈해서 좋았다. 약간 알딸딸한 기운은 그을음이 낀 것 같은 머릿속을 오히려 맑게 해주었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니까 집중력까지 좋아졌다. 더불어 희한하게도 평소에 느끼던 졸음기마저 사라져버렸는데, 그 때문에 나는 학원에서 배우는 교제의 예습과 복습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학교 수업시간은 잠 보충시간으로 때우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적당한 알코올 기운이 위장을 자극했기 때문인지 점심까지 나는 아주 달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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