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성안에서 찾아진 와편과 토기편
성안에서 찾아진 와편과 토기편

성 안에 산란한 고대의 역사

온달산성에서도 많은 삼국시대 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은 역시 신라와편이다. 산견되는 일부 적색와편은 이 성의 본래 주인이 고구려였음을 알려준다. 성의 중요성으로 혹시 고구려 연화문 와당은 보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 성에서도 흔히 보이는 것은 평기와편이다.

기와 문양은 선조문(線條紋), 격자문(格子紋), 민무늬(無文) 등으로 안쪽에는 적색기와 배면에서는 고구려 특유의 직포(織布)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경기도 임진강, 한강 일대의 고구려 산성에서 산견되는 적색기와도 조사되고 있다. 연질의 회색 신라기와는 모두 선조문으로 경주 반월성 등 유적에서 찾아지는 와편과 같다. 토기는 신라 회색 연질, 경질 토기류, 경질 장경호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산성 주변에는 온달과 연관이 있는 이름들이 전해 내려온다. 성 아래에 있는 동굴은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호)로 불린다. 강 건너에서는 장군무덤,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성이다. 남매 축성 설화가 이곳에서도 채집된다.

온달산성은 영월 정양산성처럼 성벽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축조 방법이나 보축, 유물의 출토 현황 등으로 보아 정양산성처럼 고구려가 초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죽령을 넘어 적성을 점령하고 영춘에 진출한 신라에 의해 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양 온달산성
단양 온달산성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의 기록

온달과 평강공주는 고구려사의 아름다운 로망이다. 가난하고 우직함으로 조롱받던 바보온달이 고구려 제일 귀인인 평강공주를 만나 일약 출세가도를 달리는 행운아가 된 것이다. 온달은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효자였으며 건장한 체격에 순수했던 청년이었던 것 같다.

고구려 사회는 백제나 신라보다는 남녀 간 사랑이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이루어졌음을 이 설화는 알려주고 있다. 제10대 왕 산상왕(山上王)이 하천계급이 살던 주통촌에서 만난 처녀와 사랑하여 아들을 낳자 그녀를 궁중으로 데리고 와 후처로 삼은 고사도 신분의 벽을 넘는 사랑의 역사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의 기록이 재미있어 글대로 옮겨본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왕은 매번 이런 말을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睦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上部, 동부) 고씨에게 시집보내고자 하니, 공주가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날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께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노릇 하는 이는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이 잘못되었으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진정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네 갈 데로 가거라.”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이에 공주는 보석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었다. 그의 집에 이르러 눈먼 노모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여쭈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니 귀인이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보니 향내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매끄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꾐에 빠져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산 속에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하기에 마땅한 행동이 아니니 필시 너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마침내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지극히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진실로 귀인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단지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꼭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윽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 노비와 소, 말과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모두 갖춰졌다.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했다. “부디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마시고 나라에서 키우던 말 중에서 병들고 파리해져 쫓겨난 말을 골라 사십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가 부지런히 기르고 먹이니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해서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갔다. 이때 온달도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의 말 달리는 게 항상 앞서고 잡은 짐승 또한 많아서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묻고는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오자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떨쳐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공로를 논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며 “이야말로 내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왕의 총애가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엄과 권세가 날로 융성해졌다.

(時後周武帝出師 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婿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단양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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