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이해청(李海晴)은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학습원(學習院) 전문학교(專門學校) 이공학과(理工學科)를 졸업하였으며, 그 이후 동경제국대학교(東京帝國大學校) 독어학과(獨語學科)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동경제국대학교 재학 중에 청천벽력(靑天霹靂)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일제가 그에게 학병징집(學兵徵集)을 강요하였다. 구체적으로 학도지원병(學徒志願兵)이라는 미명 하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청년들을 전쟁터에 강제로 징집하였다는 것인데 이해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와 관련해 학병징집을 강요받을 당시에 이해청은 황손(皇孫)의 자존심(自尊心)을 지키면서 학병징집을 과감하게 거부하였으며, 또한 유학하고 있던 귀족들의 자녀들 중에서 일부가 학병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학병거부로 인하여 이해청을 포함한 귀족들의 자녀들이 함께 함경남도 원산의 철공장으로 강제징용(强制徵用)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은 만약에 그가 학병거부를 혼자 결행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자녀들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공동으로 거부한 것이 팩트로 밝혀진다면 이것은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는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판단되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한편 이해청을 친아들 같이 생각하였던 의친왕비(義親王妃)가 그의 신변을 걱정하자 의친왕비의 친척 동생이 철공장에 가서 근처에 방을 얻어 그가 신경쇠약(神經衰弱)에 걸려 서울로 올 때까지 머물렀다고 하니 친척 동생의 희생정신(犧牲精神)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해청이 철공장에서 일할 때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것인데, 그러한 단서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면 공장에서 누군가로부터 슬리퍼로 얼굴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는 친척 동생이 의친왕비에게 전한 내용이라 하므로 신빙성(信憑性)이 크다고 본다.

한편 의친왕비는 자녀가 없었다는 것인데 2세 때 이해청을 두고 사동궁(寺洞宮)을 떠난 생모(生母)를 대신하여 6세 때 계동궁(桂洞宮)으로 입적(入籍)하기 전까지 사동궁에서 그를 직접 양육하였다.

그러한 이해청이 경성유치원(京城幼稚園), 서대문소학교(西大門小學校),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졸업한 이후 일본에 유학하게 된 과정을 관심 깊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청이 학병징집(學兵徵集) 거부로 인하여 강제징용(强制徵用)을 가게 된 이후 철공장에서 신경쇠약에 걸렸으나 그가 서울로 귀경(歸京)한 이후 의찬왕비가 남연군(南延君) 묘소(墓所)가 위치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데리고 가서 헌신적으로 간호한 덕분에 회복되었다.

이해청은 이러한 고비를 넘긴 이후 1945년 광복(光復)을 맞이하였으며 이듬해인 1946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編入)하였는데, 여기서 입학(入學)이 아닌 편입으로 된 배경은 그가 동경제국대학교(東京帝國大學校) 독어학과(獨語學科) 재학 중에 강제징용에 끌려갔기 때문에 편입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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