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권력은 무상하다. 무도(無道)한 권력은 국민의 저항으로 더욱 생명이 짧을 수 있다. 그러한 이치에 비추어 볼 때 리비아의 카다피가 42년을 장기 집권한 것은 예외적인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독특한 광기(狂氣)의 소유자다.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내세워 ‘인민이 권력의 주인’이라고 했지만 그의 광기 밑에서 인민은 주인이 아니라 독재 권력에 굴종하는 ‘노예’였다. 권력의 주인은 그 자신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인민을 노예로 부리던 그의 광기도 마침내 스러졌다. 10년도 지겨웠을 권력이 권불십년(權不十年)의 10년이 아니라 40년을 넘겼다. 그의 광기가 인민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맨 탓이었다. 하지만 당나라 때의 위징(魏徵)이 한 말이 옳았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수능재주 역능복주, 水能載舟 亦能覆舟)’. 이 말에서처럼 배를 뒤집는 ‘성난 물’이 바로 ‘성난 국민’이요 그 힘이 ‘피플 파워(People Power)’다.

지난 2월 15일 리비아 제 2의 도시 벵가지에서 카다피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불쑥 일어났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카다피에 대해서라면 감히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지배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때가 되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전회(轉回)’의 계기를 맞게 되는 법이다. 낮과 밤이 순환하고 궂은 날과 맑은 날이 뒤바뀌는 이치와 같다.

튀니지에서 발원해 이집트를 휩쓴 ‘재스민(Jasmin) 혁명’의 돌풍이 이젠가 저젠가 천지를 뒤흔들어줄 바람을 기다리던 리비아로 불어왔다. 그 바람에 온순하고 평온해 보이던 민심은 이내 배를 뒤집는 거친 바다로 무섭게 돌변했다. 리비아 국민 혁명의 서막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이렇게 해서 리비아는 카다피군(軍)과 반군 사이에 6개월여에 걸친 파괴와 살육(殺戮)의 내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는 반군의 최후의 일격, 즉 수도 트리폴리의 애칭인 ‘인어(Mermaid)’에서 이름을 끌어다 붙인 작전 ‘인어의 새벽(Operation Mermaid Dawn)’에 의해 카다피 권력의 아성은 무너졌다.

‘나쁜 권력’에는 퇴로(退路)가 없으며 ‘나쁜 독재자’에게 아름다운 퇴장은 없다. 카다피의 참담한 몰락은 그의 광기가 낳은 ‘업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율법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내리는 ‘인과응보(nemesis)’의 벌(罰)”을 받은 것과 같다. 그는 뿌린 대로 거두었다. 지금은 영웅호걸이 ‘물리적인 위압’으로 권력을 잡고 그 절대 권력을 전횡하다가 권력을 품에 안은 채 죽어도 백성들이 슬피 울어주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왕의 권력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준다. 백성들이 통치자를 선거로 뽑고 그나마 그에게 맡기는 권력의 한계와 권력 행사의 유효기간을 정해준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 인권과 민권의 시대다. 역사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야(Fransis Fukuyama)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에서 이렇게 썼다. ‘자유 민주주의는 인류 이념 진화의 맨 끝, 인류가 만든 정부의 최후 형태를 구성하며 따라서 그 같이 역사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것일 수 있다(Liberal democracy may constitute the end point of mankind's ideological evolution and the final form of human government, and as such constitute the end of history)’. 후쿠야먀는 이 글에서 인류가 숱한 시행착오와 희생을 치른 끝에 창안해낸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 역사 최후의 작품이며 아직 더 좋은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은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통하는 정치 시스템의 보편적인 가치이며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일 것이다.

여기에 역행하는 것은 카다피가 보여준 것과 같은 ‘광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카다피는 말하자면 관성을 받아 구르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발을 들고 막아선 사마귀와 같은 무리한 행태(당랑거철, 螳螂拒轍)’를 보여주다 어디론가 꼬리를 내뺐다.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카다피는 지난 1969년 나이 27세 때 육군 대위의 계급으로 친 서방 왕정(王政)을 쿠데타로 뒤집은 ‘당돌한 영웅’이었다. 그는 반미 반자본주의 노선으로 좌충우돌하는 문제아였으며 독불장군이었다. 떡잎부터 광기가 보였다. 그는 이른바 ‘그린 북(The Green Book)’에 담은 그의 도그마(Dogma) 이념으로 국민들을 영원한 자신의 추종자로 길들이려 했다. 영구집권을 위해서는 이처럼 국민들의 의식을 ‘도그마의 동굴’에 가두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광활했던 지구가 좁은 지구촌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소통이 ‘실시간 라이브(Real-time Live)’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이것 역시 그저 성공하기 어려운 ‘광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가. 지구상에는 아직 카다피와 같이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맞선 ‘당랑거철’의 ‘사마귀’와 같은 광기의 독재자들이 많다. 이 같은 역사에 대한 ‘역류’는 반드시 망한다는 ‘하늘의 법칙(Logos)’을 그들은 모르는가. 광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리비아 사태를 끝으로 ‘재스민 혁명’의 바람은 잦아들 것인가. 절대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끝까지 결사항전을 외치던 최강의 강적 독재자 카다피의 광기를 무너뜨림으로서 그 ‘바람’은 오히려 더 강한 힘과 탄력을 받게 됐다. 필시 방향을 바꾸어 어딘가에서 더 세차게 불어댈 것이다. 그 ‘바람’이 토네이도(Tornado)처럼 맹렬한 선풍으로 불어와 압제자들을 풍비박산 내주기를 고대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은 다음에는 또 어느 독재 권력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놓을 것인가. 겉으론 태연한척해도 내심 벌벌 떨고 있는 독재 권력들을 우리는 훤히 알고 있다. 비단 마호메트 유일신(唯一神)의 종교가 정치와 인권, 개인의 삶을 온전히 장악하고 지배하는 이슬람 세계만의 문제일 것인가. 아니다. 칼 마르크스의 원형(原型) 공산주의 이념이 구소련에서 무너졌지만 카다피의 그것과 같은 광기로 그 도그마의 잔재(殘滓)에 얹히어 간신히 시대착오적인 독재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교조적인 독재 정권들도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이런 곳이야말로 ‘바람’의 좋은 표적이다.

‘바람’은 이런 곳들에 휘몰아쳐 종래에는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의 사각지대, 글로벌 시대의 풍요로움에서 소외된 폐쇄 공간들을 날려버리고 세계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관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추세라고 읽혀지지 않는가. 탄력을 받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쉽게 멈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재자의 광기는 죄악이며 유죄이지만 맹자의 말처럼 나쁜 독재자에 몰아내는 ‘역성(易姓) 혁명’의 광적인 열풍은 정당하다. 그것은 반역의 광기가 아니며 무죄인 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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