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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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입동 때면 생각나는 한시(漢詩)가 있다. 조선 선조 때 부안 명기 매창(梅窓)의 늦은 가을 시다. 서자출신 방랑시인 유희경을 사모한 매창은 절개를 지키고 오직 한 남자만을 그리워했다.

풍류로 농을 즐겼던 천재 시인 허균의 프러포즈마저 외면한 의기 매창. 서울에 있던 유희경은 늦은 가을날 연인을 못 잊어 시를 써 보낸다. 그대의 집은 낭주(浪州. 부안의 별호)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누나.

매창도 답시를 보낸다. 그것이 너무나 유명한 ‘이화우(梨花雨)’라는 시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 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여류 시인 매창의 인생은 허난설헌이나 황진이처럼 짧았다. 서른여덟 살 나이로 추운 겨울을 노래하며 임만 그리다 죽음을 맞은 것인가. 그녀는 거문고를 사랑해 무덤 속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한다.

‘기구한 운명을 한탄함(自恨薄命)’에서 매창은 거문고를 사랑하는 뜻을 담았다. 이 속에도 님 그리는 정이 넘친다. (원문을 소개한다)

온 세상이 피리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거문고를 잡았는데/ 이날 가는 길이 어렵다는 걸 함께 알았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직도 만나질 못하고 있으니/ 어째서 다듬지 않은 옥돌이 형산(荊山)에서 울고 있는가(擧世好竽我操瑟 此日方知行路難 刖足三慙猶未遇 還將璞玉泣荊山).

연인 유희경이 사랑한 거문고를 안고 저승길을 가고자 한 것인지. 유언에 따라 무덤에 거문고를 같이 묻었다고 전해진다. 몇 년 후 찬 겨울날 유희경이 매창을 만나러 부안에 왔을 때 이미 그녀는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매창을 짝사랑한 허균은 애도시를 지었다. 허균의 가슴속에 그녀는 끝내 지울 수 없는 연인이었는지 모른다. 매창 사후에도 허균은 쉽게 부안을 떠나지 못했다.

어제가 겨울의 문턱 입동. 월요일 날씨가 영하권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제 겨울은 시작인데 긴 겨울을 지나려니 서민들은 갈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리라. 코로나 사태로 힘들게 살고 있는 서민들의 마음은 더 냉골이다.

현대 시인 박노해는 겨울을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으면….’

대선 현장에서 여야 후보들은 연일 시장방문 광폭행보를 하고 있다. 춥게 지내는 자영업자, 시장을 방문해 상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한 방문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매창과 유희경 같은 진정성 있는 연인의 마음으로 어려운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행보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일까.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들 마음속에 따뜻함이 산다면 추운 겨울도 춥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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