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호 소설가
그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내를 잃었다. 암으로.

당시 그는 삼십대의 한창나이였지만 재혼을 하지 않았다. 새엄마를 들이면 어린 아들이 혹시 마음에 상처라도 받을까 싶어서였다. 계모 밑에서의 아들 심정을 헤아린 아비의 자기희생이었다. 이토록 그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을 세심하게 아끼고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랬건만….

자식이 죽자고 속을 썩이면 겪다 못한 부모는 억장이 무너져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야, 라고.

그의 아들이 그랬다. 갖은 정성과 온갖 희생으로 자식을 키웠건만 그의 아들은 커갈수록 그의 속을 젓갈 냄새가 나도록 썩혔던 것이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웬수는 무려 일곱 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재학 중에 일으킨 문제 때문이었다.

2. 168바늘. 이것은 여태껏 웬수가 가담한 폭행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찢어진 상처를 꿰맨 바늘의 총 합산 숫자다. 상대의 뼈를 부러뜨리거나 금이 가게 한 경우도 아홉 차례나 있었다.

3. 웬수는 성폭행 사건도 네 건이나 저질렀다.

위의 목록은 빛나는 그의 아들 이력을 대충 정리한 것인데, 그 바람에 그는 그의 수입 대부분을 아들놈 치다꺼리하는 데 소비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겪은 경제상의 손실이었다. 가해자의 아비로서 피해자나 그 가족들한테 수없이 머리를 조아린 창피나 구차스러움 따위의 정신적 부담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 그는 이즈음 책 읽기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아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책을 뒤적거리던 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탓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문예잡지 한 권을 훑어보던 그는 눈을 확 끌어당기는 시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짧지만 너무나 가슴을 치고 심금을 울리는 시여서 그는 그 작품을 읽는 순간 온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정말 이심전심의 표현이네. 자식이 오죽 웬수 같았으면 이렇게 읊었을까!”

그는 이 시를 지은 시인의 심정이 곧 자신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한참을 감동에 젖어 있던 그는 종래에는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의 빛마저 그 시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즉, 이 시를 아들놈이 읽어보게 하면 녀석이 조금이나마 반성의 기미를 보이거나 아비의 마음을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그 시를 잘 볼 수 있도록 웬수의 방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 그의 아들이 자살을 한 건 그 이튿날이었다. 숨이 끊긴 웬수의 손에는 책에서 뜯어낸 시가 유서라도 되는 양 들려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와 조문했다. 사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아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개망나니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마 제 놈도 충격을 받은 때문이겠지. 그 시를 읽고 비로소 아비의 마음을 이해한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세상을 등진 걸 거야.”

그의 친구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위로를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멍한 눈길을 허공에 던지고 있던 그는 이윽고 곰삭은 속을 게우듯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은 절대로 뉘우치거나 반성을 할 자식이 아니야. 내 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어. 놈이 자살을 한 건 딱 한 가지 이유에서야. 이 아비 가슴에 더 확실한 못을 박기 위해서. 곧, 자식이 그렇게 웬수 같으면 먼저 뒈져줄 테니까, 어디 당신 혼자 잘 살아보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결국 죽으면서까지 나한테 엿을 먹인 거지.”

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처음에는 입을 딱 벌렸지만 나중에는 모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참고로 그의 아들이 손에 꽉 움켜쥐고 죽은 짧은 시의 전문을 밝히면 아래와 같다.

<아들>
아들
이 웬수야
니는 좋겠다
아직 니 애비가 살아 있어서.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