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주식 폭락, 미국의 신용등급 저하, 영국에서의 폭동, 가계대출, 물가의 상승 등 최근의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 실물 경제 위축으로 인해 소비가 줄어들고 개인의 수입도 불안정하다.

게다가 수해와 장마, 태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수급 불균형마저 먹을거리의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과일, 돼지고기, 채소류 값이 30~50% 급등했다고 한다. 의식주(衣食住)가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식(食)은 개인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한마디로 서민의 마음이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무슨 큰일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두려움의 무서운 기운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침투하고 있다. 난국이다. 민란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사람들은 과연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렵고 불안하다.

월급은 일정한 액수인데 지출 부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면, 당연히 미래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전셋값은 폭등하고, 아이들의 학원비와 먹을거리 비용이 부담되며, 기름값이 머리를 맴돈다. 집을 줄여서 더 싼 지역으로 가야 하나 생각하고, 이제부터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자 다짐하며, 아내에게 은근슬쩍 부업을 강요하거나 아이들 학원을 줄이라고 압박할 생각을 하니 체면 손상이 크다.

그러나 그깟 체면의 손상이 뭐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가는 나의 노후가 비참해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당장 5년 후 우리 가족의 삶이 궁핍해지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니 두려움의 감정이 자존심 저하를 뒤엎는다.

경제적 측면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확산되어서 나의 건강, 안전, 환경 등에까지 생각이 뻗치니 그야말로 매사 불안하고 좌불안석이요, 쓸데없는 걱정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예를 들어 ‘내가 실직하고 우리 집이 가난해져서 대출 이자를 못 갚아 길거리에 나앉게 되어 결국 노숙자가 되면 어떡하지?’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들게 되면, 이른바 강박장애 내지는 범(汎)불안장애 등의 정신과적 질병에 걸리게 된다.

상실감의 우려도 크다. 상실이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의 삶의 질이 줄어드는 것 역시 잃어버림이다. 설렁탕이나 갈비탕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던 내가 이제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대체한다면, 그것이 바로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좋아했던 점심 메뉴를 이제 비싸서 더 이상 자주 먹지 못하는 경우라면 상실감은 극에 달한다. 그깟 점심 한 끼 또는 먹는 것 가지고서 상실감 운운하는 것이 다소 부끄럽고 치졸한 듯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껏 불평하지 못하니 상실감은 오히려 속에서 더욱 커지기만 한다.

사랑했던 여자 또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느끼는 상실감이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마음껏 위로받을 수 있겠지만, 점심 식사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상실감을 어디 가서 떳떳하게 위로받고 보상받을 수 있으랴. 하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의 문제라는 사실이 한 가지 위안거리다. 보편성(universality), 즉 나에게만 예외적으로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강조하는 것은 정신치료의 기법들 중의 하나다.

하지만 아무리 보편성을 스스로 강조한들 상실감이 점차 커지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우울증에 걸리게 만드는 가장 큰 심리사회적 요인이 바로 상실(loss)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50평대의 고급 아파트에서 대형 승용차를 굴리고 일식집에서 사람들을 만났던 한 중년 남성이 사업에 실패한 후 원룸 반지하방으로 옮기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게 되면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례가 생각난다.

점심값이 비싸서 예전과 다르게 싼 음식만 먹으며 상실감과 비참한 기분에 괴로워하다가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을 이제 곧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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