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庚戌國恥) 즉, 100년 하고도 한 해 전 우린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수많은 선진들의 피의 대가로 36년이 지나 8월 15일 기쁨의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오늘이 그 66번째 맞는 뜻깊은 광복절이다.

암울했던 그날들을 돌이켜 볼 때 광복은 참으로 가슴 벅찬 순간이 아닐 수 없었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많은 숙제 또한 우리에게 남기고 있음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의 함성과 함께 찾아온 광복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66년 전 광복의 교훈은 우리에게 참의미의 광복이 또다시 남아 있을 뿐 진정한 광복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로서 회복돼야 할 게 다 회복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증거가 바로 ‘光復’ 즉 ‘빛으로의 회복’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이며 찾은 것이 무엇이며 또 찾았다면 무엇으로 찾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만하다.

다시 말해 우리에겐 빛으로 다시 회복해야 할 진정한 광복(光復)이 엄연히 남아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빛으로 회복하는 게 광복’이라 할 것 같으면, 이치적으로 빛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경서에 기록된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니”라는 글과 예수가 “나는 빛으로 왔으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빛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光復이라 함은 宗敎統一을 의미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유불선을 포함한 모든 종교를 하늘의 뜻으로써 하나로 통일할 것을 남과 북의 대립과 대치 속에 감춰놨음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구 상에 유일한 분단국인 대한민국, 남과 북의 통일문제를 고민하고 경험하게 하는 뜻은 또 다른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위해 하늘이 허락한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가져본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문제점을 덮고 가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본질은 없고 변죽만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꼬집어보는 것임을 이해했으면 한다.

이러한 진정한 광복으로 가는 길목에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 또한 산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도적 통일에 앞서 남과 북이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는 분명히 있다. 예컨대 문화 또는 소통의 장을 통한 통일 접근이 있다. 이러한 현실적 대안의 걸림돌은 상호 생각과 가치관의 다름이라는 무서운 장벽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문화적 충돌이 더 큰 장벽이라는 점이다. 한 탈북자는 “북에서 남으로의 목숨을 건 탈북은 맞으나, 사선을 넘은 후 왜 내가 넘어왔지 하고 의문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즉 “증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는 원망 섞인 고백이었다. 긴 세월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는 이미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이요 형제라는 민족적 일체성에서 괴리감이 생기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또 남과 북을 떠나 세계적 측면에서도 다문화로 인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문화적 충돌을 속히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극우주의자로 자처하는 한 젊은이의 흉악한 범죄행위와 요즘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청년들의 폭동으로 인한 방화와 테러 등 세계 각처에서 하루가 멀다 않고 발생하는 일련의 충돌은 사건의 동기는 다르다 하겠지만, 결국 이념적 종교적 민족적 인종차별 등 문화적 차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지구촌의 모순을 하루속히 극복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덕목이 있다면 바로 종교의 통일로 인한 진정한 광복임을 시대적 차원에서 깨닫기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문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해 나갈 선구자적 민족이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라는 역사적 숙명을 잊어선 안 될 것이며,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우리는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추구해 왔고, 앞으로 실천해 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음도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로써 이번 66돌 광복절을 맞아 광복과 통일에 대한 참의미를 진단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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