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세 번째 사진 설명-윤덕호 감독은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 허 블라디슬라브(오른쪽) 씨가 고국 땅을 밟는 것을 도왔다. 오른쪽 사진은 윤덕호 감독 (사진제공: 윤덕호 감독)

까레이스키의 친구·지킴이로 나선 윤덕호 다큐멘터리 감독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고려인(까레이스키)의 친구이자 지킴이로 알려진 윤덕호(64) 다큐멘터리 감독. 윤 감독은 사비를 들여 고려인과 독립투사의 후손을 돕는 데 열정을 쏟아붓는다.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지났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한 세월이지만 그는 고려인들에게 고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한결같이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10일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 5층에 위치한 윤 감독의 일터를 찾았다.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는 언론에 소개된 고려인 독립투사 후손과 그에 관한 기사들이 붙어 있었다. 지난 기사를 통해 독립투사 고려인 가운데 왕산(旺山) 허위(1854~1908) 선생의 후손을 귀화시키는 데 숨은 1등 공신이 윤 감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윤 감독이 직접 찍은 영상에서 고려인들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었다. 쉰에서 예순가량 된 한 고려인은 왼쪽 발목 주위가 약 20~30㎝의 근육조직이 보일 정도로 피부가 손상됐다. 하지만 환자는 무국적자이다 보니 현지에서 병원 치료를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간 상처 난 부위를 양동이에 담긴 소금물에 담그기만 반복했다. 환자에게 있어 소금물은 최선책이었다.

윤 감독은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나섰다. 치료받은 고려인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이어진 영상에서 많은 고려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한 여인과 윤 감독이 등장했다. 여인은 바로 거동이 불편해 누워만 있었던 환자였다. 흉터가 남긴 했으나 걸을 수 있게 됐고 상처에 새살이 돋았다.

“아무래도 현지에서는 자국민을 우선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무국적자인 고려인을 어느 누가 신경 쓰겠습니까. 더욱이 안타까운 점은 고려인이 우리 한민족이지만 한국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죠. 그들은 현지인도 한국인도 아니란 말입니다.”

20년간 그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윤 감독의 말에는 탄식이 묻어나왔다. 그는 “고려인은 이방인이 아니다.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우리 동포”라며 “정부가 고려인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고려인의 희로애락은 윤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는 200㎏ 정도 되는 방송용 카메라 장비를 손수 운반해 고려인의 삶속으로 들어갔다. 특히 그가 주로 다닌 곳은 키르기스스탄. 그는 한번 가면 적어도 3~4개월은 그들과 함께한다. 모든 과정은 사비를 들여 진행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에 전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고려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관찰하던 끝에 한국 풍경이 담긴 달력을 생각해냈다.

“고려인들은 늘 고국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정착촌에는 한국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이 없죠. 그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문화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1년 내내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던 찰나 달력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궁과 산수풍경이 담긴 달력 3000부를 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달력보내기 운동은 시작한 지 5년 만에 달력이 1만 5000부로 늘었다. 당시 달력을 받아든 고려인 할머니들 눈엔 고국을 1년 365일 바라볼 수 있다는 설렘과 한국 땅을 직접 보고 싶은 그리움이 깃들었다. 윤 감독은 그런 어르신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그는 더 나아가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의 손자 허 블라디슬라브 씨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왔다. 열성을 다해 고려인을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한민족이니까”라고 짧고 굵직하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운전사가 윤 감독을 지금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일로써 방문한 타국에서 어설픈 한국어로 말을 건네받은 윤 감독은 그때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운전기사 세르게이 씨는 “아버지가 늘 조국을 이야기했다. 한국인을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고향이 경상도 함양이라고 말하는 세르게이 씨의 아버지는 “내가 죽거든 뼈 한 조각이라도 고국에 묻어 달라”고 전했다. 당시 한국과 소련 간에 정식 수교를 맺지 않은 터라 윤 감독은 그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윤 감독이 출국하던 날 세르게이 씨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고향을 잊지 못했단다. 비보를 들은 윤 감독은 고려인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윤 감독의 고려인 돕기는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된다. 현재 자신의 블로그 ‘영상 제작 40년, 윤프로의 공간입니다’에 고려인에 대한 영상과 정보를 게시해 그들의 현실을 알리고 있다. 여느 고려인돕기 시민단체만큼 구색이 잘 갖춰졌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윤덕호’ 또는 블로그명을 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고려인과 그 가운데 독립투사 후손들이 우리 동포임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스스로 한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정부와 국민들도 그들을 우리 동포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고려인들은 우리 동포입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났어도 우리말과 글, 문화를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죠. 우리도 역사 속의 그들을 잊지 말고 그 후손들을 생각해야죠.”

 

1863년 북방개척 이민정책…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1863년 북방개척 이민정책을 실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고려인은 13가구였으나 1910년대 항일 독립운동을 하면서 20만 명을 넘었다. 국내보다 국외가 일제의 감시를 피하는 데 수월하다고 판단한 독립투사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 등지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민족이주정책으로 소수민족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구소련(현재 러시아연방)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1992년 소련에서 각 연방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연방국가들은 자국민 보호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이민족 차별정책을 심화했다. 이로 인해 소수민족들은 많은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자체적으로 마을을 형성해 한글을 배우는 등 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은 약 55만 명. 이들은 대부분 고려인 3~5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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