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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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일본군의 2차 대전 전쟁범죄에 대한 1949년 하바롭스크 재판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특히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강력히 비난했다. 학술회의가 끝나고 9월 중순 일본 해상 자위대가 일본 주변 해역에서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동해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을 했다. 양국의 훈련이 상대방을 겨냥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난해부터 러시아와 일본은 상대방을 자극하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에서 ‘북방영토’라고 부르는 남(南)쿠릴열도는 2차 대전 이후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는 가운데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러시아 캄차카반도와 일본 홋카이도 사이 열도의 남쪽 4개 섬을 말한다. 2019년 6월 푸틴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쿠릴열도 4개 섬의 공동개발 사업에 대해 합의했는데 합의에 대한 양측의 해석이 달라 마찰이 있었으나 갈등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 8월 일본에서 ‘종전 75주년’을 맞아 소련의 1945년 대일본 전쟁 참전은 1941년 중립조약을 위반한 행위라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됐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먼저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은 소련과 전쟁 중인 나치 독일을 지원한 일본이며 이로써 중립조약은 무효가 됐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이 있었는지 러시아는 이번 하바롭스크 국제학술회의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푸틴 대통령이 화상으로 축사를 했으며 연방정부 장관들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검찰총장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를 중심으로 자행된 생체실험과 생물무기 연구개발을 규탄하고 이제라도 국제사회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법적 및 도덕적 책임을 묻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냉전 상황에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으로 끌어들인 미국의 결정에 따라 일본의 많은 전쟁범죄가 그냥 묻혔다는 비판도 있었다.

러시아-일본 간에 갈등이 상존하는 것은 남쿠릴열도 영유권 분쟁 및 평화조약 체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평화조약 체결 후 남쿠릴열도 문제를 논의하자는 입장이고 일본은 영토 문제의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는 2차 대전 중 대일 전쟁 참전의 대가로 연합국이 남쿠릴열도의 영유권을 승인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확인됐다는 입장인 데 반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달리 해석하면서 소련은 이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었으므로 조약을 원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사회의 전반적 우경화에 따라 독도뿐만 아니라 남쿠릴열도 등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강해지고 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맞대응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7월 중순에는 러시아 미슈스틴 총리가 남쿠릴열도를 방문했고 10월 중순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동해상에서 미사일 발사 훈련을 실시하자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신임 기시다 총리는 일본의 주권이 남쿠릴열도에 미친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남쿠릴열도 영유권 문제나 평화조약 체결은 물론 남쿠릴열도의 공동개발 구상도 제대로 이행되기 어려워 보인다.

쿠릴열도를 둘러싼 분쟁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의원 시절 2011년 5월 독도특위 소속 의원들과 함께 한국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쿠릴열도의 하나인 쿠나시르섬을 방문해 일본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강창일 주일 대사는 지난 6일 주일대사관에 대한 화상 국정감사에서는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강 대사가 경솔한 것인지 모르겠다. 남쿠릴열도 분쟁은 이웃 국가들 사이 갈등이고 간접적으로 우리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예의주시하되 중심을 잘 잡아 공연히 한일 및 한러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하바롭스크 국제학술회의에는 중국, 이스라엘, 인도, 몽골 등에서도 참석했는데 한국에서는 모스크바 거주 학자 한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러시아 내 우리 공관에서는 참석하지 않은 것은 의외이다. 당시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대상의 상당수가 조선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문재인 정부가 취임 이래 과거사 관련 내내 일본에 대해 날 선 태도를 보여온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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