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판도라 상자’가 열렸을 때의 상황이 그랬을까.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미국 신용등급의 강등(降等) 조치가 글로벌 경제에 미친 충격과 혼란이 일파만파다. 한국 증시에서는 폭락 장세를 견디지 못해 코스피(KOSPI)에는 사이드카가, 코스닥(KOSDAQ)에는 서킷브레이커와 같은 거래 중단 조치가 발동됐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증시와 유럽 증시도 패닉(공포, Panic) 상태에 빠져 허우적대기는 마찬가지였다. 2011년 8월 초순, 지구의 기후 변화가 만들어낸 혹심한 여름의 열기와 미증유의 장마에도 눈 녹듯 녹아내리는 투자 자산을 보면서 증권 투자자들은 한겨울과 같은 한기(寒氣)를 느꼈을 것 같다.

비너스 여신과 같이 아름다운 판도라가 ‘결코 열어서는 안 된다’며 제우스가 하사한 ‘선물 상자’를 호기심을 못 이기고 열었을 때 온갖 재앙과 악(惡)들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바람에 평화로웠던 세상은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으로 가득 차게 됐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그 ‘상자’를 얼른 닫아버렸다. 그렇기에 상자 밖으로 나와 꽃을 피웠어야 할 ‘희망’은 상자 안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기왕지사, 그 ‘희망’마저 풀려 나왔더라면 사람들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림으로써 초래된 이 험한 세상살이의 고통과 불행을 좀 덜 겪어도 됐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허구적인 그리스 신화의 극적인 요소를 반감시킬 것이 분명하지만 허약한 인간의 상상력은 그같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세상에 ‘희망’의 꽃이 만발해 ‘절망’이라는 악마의 힘을 제압해줄 수만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으랴만, 불행히도 사람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절망과 희망의 불연속적인 전변(轉變)의 반복이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 안에 꽁꽁 갇힌 그 ‘희망’은 사람 마음속의 ‘희망’, 절망 속에서도 결코 생(生)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꺼진 불 속의 불씨 같은 ‘희망’, 바로 그것이란다. ‘희망’은 비록 열매가 없고 실체가 없는 관념 자체만으로도 사람이 인식(認識)할 수만 있다면 사람살이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든 세상 밖에 나와 있든 생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하등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신용평가회사 ‘S&P(Standard and Poors)’가 세계 최고의 채무국가 미국의 ‘판도라 상자’를 기습적으로 열었다. 초강대국답게 미국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유지해왔던 최고의 국가 신용등급 ‘트리플 A(AAA)’를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더블 A 플러스(AA+)’로 낮추어 놓은 것이다. 이 조치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국제질서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태산(泰山)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체면은 험하게 구겨졌다. 대신 미국의 아킬레스건(腱)인 위험 수준의 국가 채무와 재정 건전성 문제를 겨냥해 쿠데타적 ‘기습’을 가한 ‘S&P’는 일약 세계 평가 시장에서 ‘무디스(Moody’s)’에 눌려 지내던 처지의 명성을 크게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 쿠데타의 주역이 인도 출신의 경영학 박사 S&P의 대표 ‘디븐 샤르마(Deven Sharma)’였기에 미국 신용등급의 강등 조치로 초래된 충격을 ‘샤르마 쇼크(Sharma Shock)’라 한다.

그 같은 ‘샤르마 쇼크’를 일으킨 ‘거사(擧事)’의 주역 샤르마의 말에는 어렴풋 공감이 갈만한 어떤 호기로 가득하다. 그는 말했다. “시장은 아주 신비한 곳이며 우리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영역에 들어왔다. 우리가 발견한 리스크(Risk)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게 ‘S&P’의 임무다. 본 대로 말해야 우리가 산다. 이번 조치가 ‘S&P’의 명성을 한결 높여줄 것으로 본다. 투자자와 시장 전체는 미국에서 발견한 리스크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했다. 샤르마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금융시장의 큰손이며 흔쾌히 사재(私財)의 사회 환원에 애쓰는 워린 버핏의 투자회사, 세계 평가 업계 1위인 ‘무디스(Moody’s)’는 자사가 매긴 미국의 신용 등급에 손댈 생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샤르마 쇼크’가 세계 금융시장에 불러온 혼란만큼이나 신용 평가 시장에도 혼란과 혼선이 빚어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어떻든 ‘샤르마’가 열어 보인 미국의 판도라 상자에서 나온 것은 세계 금융질서와 경제를 뿌리째 흔들어 놓을 우려를 낳는 충격과 혼란, 재앙이다. 적어도 ‘희망’은 아니다. ‘샤르마 쇼크’로 미국은 단단히 망신을 당했다. 그렇지만 미국을 망신케 한 그 ‘샤르마 쇼크’는 세계 경제와 국제 질서의 기관차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성을 절감하게 해주는 반사효과를 낳았다.

아직 미국이 주도하지 않는 세계 경제와 국제 질서는 준비되지 않았다. 중국이 ‘G2’의 강대국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 해도 국제질서에서 책임 있게 미국의 대역(代役)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한 말을 못 한다. 유럽이나 일본도 미국이 있어 큰소리를 치는 형편이어서 그런 역할에 못 미치기는 중국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샤르마 쇼크’는 당장의 세계 경제에 대한 불길한 공포의 차원을 넘어 미국의 붕괴 우려에 대한 공포를 던져주었다.

그 공포가 더 무서운 공포로 지구촌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 우호적이거나 비우호적이거나 모든 나라가 미국의 상처를 감싸주고 처진 어깨를 부추겨주기에 바쁜 까닭이 그것일 것이다. 말하자면 ‘공멸(共滅)’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각국으로 하여금 미국이 싫든 좋든 일치된 모습으로 미국을 거드는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이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그 ‘희망’이 한 번 열린 미국의 판도라 상자 안에 남아 있든 아니면 다른 나쁜 것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든 상관없다. 당장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을 쓴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역사가 생성 성장 성숙 쇠퇴의 순환을 반복하는 유기체의 생명처럼 일개 나라의 성쇠도 그 같은 법칙에 따른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은 그 같은 역사 순환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슈펭글러는 “서구와 아메리카 문화는 19세기에 겨울로 접어들었으며 20세기에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이 말을 유의하면서 미국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서 초래된 혼란과 재앙, 공포를 감상한다면 부질없이 과만한 것이 되는 것인가. 그보다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한 가닥이라도 ‘희망’을 찾아내는 노력이 급선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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