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조창환(1945 ~  )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홍시 몇 알
푸른 하늘에서
마른번개를 맞고 있다
새들이 다닌 길은
금세 지워지고
눈부신 적멸만이
바다보다 깊다
저런 기다림은
옥양목 빛이다
이 차갑고 명징한
여백 앞에서는
천사들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시평]

한낮은 제법 땀이 날 정도로 덥지만, 이제 아침저녁은 날씨가 제법 썰썰하다. 가을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밤이면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리고, 그래서 더욱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멀지 않아서 단풍이 들고, 나무들은 하나 둘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차츰 헐벗어갈 것이다.

시골 마을의 감나무, 헐벗은 가지 끝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붉은 감 하나, 혹은 둘. 우리는 이러한 감을 까치밥이라고 부른다. 까치가 먹으라고 일부러 따지 않고 가을 푸른 하늘자락에 매달아 둔 감. 까치밥이란 이름은 우리 선조들의 마음 씀이요, 여유로움이 아닐 수 없다. 눈부신 적멸만이 바다보다 깊은 가을 하늘의 여백 같은 여유로움이다.

우리가 ‘여백’을 갖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네 삶 속에서 나름대로 ‘여유로움’을 지닐 수 있다는 거,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평화와 행복감을 경험하게 해 준다. 가을하늘에서 빨간 홍시 몇 알, 까치밥이라 불리는 그 붉음이 파란 하늘에 온몸을 파묻히듯 매달려 있는 그 모습, 이 가을,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은 더없이 여유로워진다. 지상에서 목숨을 지닌 자가 누릴 수 있는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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