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문화재 숲 ‘영월ㆍ정선’

단종의 한 보듬은 ‘영월’, 우리네 한을 노래한 ‘정선’

한민족의 삶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한(恨)을 얘기한다. 때론 외세에 짓눌려서, 때론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더 자주는 가진 자들의 농락에 희생된 우리네 선조들의 거칠고 둔탁한 인생이 그렇게 한을 대물림했다. 우리네 恨과 마주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어린 나이에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강탈당하고 열일곱에 세상도 등져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의 흐느낌이 있는 ‘영월’과 그 너머 서민들의 애환을 노랫가락으로 풀어냈던 ‘정선’으로 향했다.

한 많은 삶을 노래하는 ‘정선아리랑’ 삶을 체험하는 ‘정선5일장’

▲ '정선5일장' 안에 장터 공연장에서 '정선아리랑'이 흥겹게 불려지고 있다(위). /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기능보유자 김남기 옹(중간 우). ⓒ천지일보(뉴스천지)

 

고구려 때 양매현을 시작으로 군명이 자주 바뀌었던 정선은 공민왕 2년(서기 1353년)에 군명이 정선으로 개칭되면서 조선 500년을 거쳐 현재까지 ‘정선’으로 불리고 있다.

정선이란 이름만 들어도 왠지 구수하고 푸근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다음 행선지는 정선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정선5일장’으로 정했다.

정선 전래의 토속적인 5일장을 시골장터 생활문화체험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매년 4~11월까지 운영하는 정선5일장에는 각지에서 몰려드는 손님으로 매번 북적인다. 정선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나물, 약초, 옥수수 등 특산품과 장터에서 직접 제작 판매하는 짚신, 농기구 등 잊혀가는 생활용품을 사고파는 재래장터의 정겨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끌벅적한 시장에 접어들자 코끝에 구수한 메밀?감자부침, 감자떡 등 정선의 향토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이런 날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오전 11시 반과 오후 1시에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 네 명 중 한 명인 김남기 예능보유자의 가락을 들어볼 수 있는 귀한 공연이 장터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구성진 정선아리랑이 흥을 돋우자 관람하던 주민들이 어깨를 들썩인다. 너도나도 가락을 따라부르며 어깨춤을 추는 모습이 ‘정선’이란 지역의 설명을 대신했다.

김남기(75, 남) 옹은 정선아리랑의 시작은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라고 설명했다. 아낙네들이 논일, 밭일하며 사내들이 새끼를 꼬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12살 때부터 부모님과 형님들을 따라 소리를 시작한 김남기 옹은 22~23세부터 본격적으로 무형문화재로서 활동하기 시작해 벌써 50년이 훌쩍 넘도록 아리랑과 함께했다.

정선아리랑의 산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가 말하는 정선아리랑의 매력은 뭘까. 확인된 곡만 6500여 곡이 넘는 정선아리랑은 모두가 ‘시(詩)’에 곡조를 붙인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곡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특히나 恨이 서려 있다고 말하는 정선아리랑은 구성질 때는 구성지게, 처량할 때는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릴 만큼 애잔하고, 또 흥겨울 때는 흥겹게 등 다양한 색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자로 하여금 병이 난 이 몸이 인삼녹용 약을 쓴들 이 몸이 나을쏘냐.(상사병에 걸린 애절한 마음을 노래)”
“산지당 까마귀는 까왁까왁 짖는데 낭군님의 병세는 날로 깊어가네.(근심 깊은 아낙네의 노래)”

이렇게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부터 노처녀의 이야기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사를 꾸밈없이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정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우리 민족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선아리랑의 매력이라고 김 옹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김남기 옹은 “현재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정선아리랑은 우리나라의 향토민요나 마찬가지”라며 “널리 전파돼 전국적으로 불리고 또한 외국에서도 불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글: 이승연 기자 / 사진: 최성애 기자 / 영상: 손성환 기자)

(고품격 문화월간지「글마루」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