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문화재 숲 ‘영월ㆍ정선’

단종의 한 보듬은 ‘영월’, 우리네 한을 노래한 ‘정선’

한민족의 삶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한(恨)을 얘기한다. 때론 외세에 짓눌려서, 때론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더 자주는 가진 자들의 농락에 희생된 우리네 선조들의 거칠고 둔탁한 인생이 그렇게 한을 대물림했다. 우리네 恨과 마주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어린 나이에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강탈당하고 열일곱에 세상도 등져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의 흐느낌이 있는 ‘영월’과 그 너머 서민들의 애환을 노랫가락으로 풀어냈던 ‘정선’으로 향했다.

영월의 또 다른 명물 ‘김삿갓’

▲ 풍류가객 김삿갓 곧 난고 김병연을 상징하는 조형물(위). / 난고 김삿갓의 생애를 설명해주는 정주홍 문화관광해설사(아래 중앙). ⓒ천지일보(뉴스천지)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영월 땅을 찾은 가족이 있었으니 ‘홍경래의 난’ 당시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어 떠돌던 김삿갓의 가족이다. 본명 김병연의 가족은 1816년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於屯)으로 들어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게 됐다. 집안 내력을 모른 채 자란 김병연은 20세에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해 선천부사였던 조부를 탄핵한 글을 써서 장원에 뽑히며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을 겪게 된다.

그날 밤, 자신이 쓴 글이 조부를 향한 글임을 알고 “조상을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겠느냐”며 22세 때부터 삿갓을 쓰고 평생 팔도강산을 방랑한다.

그렇게 40년을 떠돌며 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 등의 비인도성을 폭로, 풍자하는 등 지배층에 대해 강한 반항 정신을 나타낸 시를 읊었고, 이는 서민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고 3년 후 아들 김익균이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했다.

현재 그가 묻혀 있는 ‘김삿갓유적지’ 내 묘역은 왼쪽은 태백산 끝자락이자 소백산 시발점이기도 해 양백지간에 유지앵소(柳枝鶯巢)형국(버드나무가지에 있는 꾀꼬리집 형국을 말함)이라고 하며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중 한 곳으로 ‘에너지가 함축된 곳’이다. 김삿갓은 죽어서야 그의 가족이 찾고자 한 십승지에 안착하게 된 셈이다.

‘평안하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을 지닌 영월, 이곳을 십승지라 생각하고 고개를 넘어온 김삿갓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월이란 지명의 참뜻은 ‘평안한 곳을 향해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글: 이승연 기자 / 사진: 최성애 기자 / 영상: 손성환 기자)

(고품격 문화월간지「글마루」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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