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문화재 숲 ‘영월ㆍ정선’
단종의 한 보듬은 ‘영월’, 우리네 한을 노래한 ‘정선’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숲과 모래톱, 기묘한 절벽, 굽이치는 강이 만들어낸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꼬불꼬불하며 험한 산길을 이르는 말), 야생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자연 그대로의 도시로 불리는 ‘영월’.
많은 아름다운 수식어를 가진 영월을 처음 본 느낌은 “한 폭의 산수화에 들어온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다.
‘비운의 임금’ 단종의 흔적을 찾아
영월은 ‘발길 닿는 곳마다 단종의 고혼과 그를 따르던 충신들의 넋이 살아 숨 쉰다’고 말할 정도로 단종과 많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단종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 청령포를 찾았다.
태어나면서 어머니 현덕왕후 권 씨를 잃고, 12살에 아버지 문종마저 승하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조선 6대 왕에 즉위한 단종. 그나마도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비참하게 강원도 영월 땅으로 쫓겨나게 된다.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2살 연상인 부인 송 씨와도 생이별이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 영월 백성들은 유배 오는 단종을 맞이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단종의 흔적을 찾아 도착한 곳은 영월군 남면 광천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청령포’. 하지만 장마로 불어난 물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는 곳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며 문화관광해설사의 입을 통해 그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단종을 그리던 충신과 영월 백성들의 애틋한 마음이 조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해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곳으로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천연 감옥’과도 같은 형태다.
풍수에 능했던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마치 섬과도 같은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고 단종은 적막한 이곳에서 쓸쓸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집 뒤 험준한 산에 올라 경복궁 쪽을 바라보며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을 생각하기도 하고 부인 송 씨를 눈물로 그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돌탑을 쌓았다. 이 돌탑 ‘망향탑’이 다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이런 단종의 모습을 옆에서 보았고, 그가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는 수령 600년이 넘은 소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단종은 이 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고 한다. 또 관음송의 가지들은 독특하게 뒤틀려 있는데 김은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를 “단종이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그것을 지켜보던 관음송도 함께 아파한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단종이 유배를 가게 되자 한양에서 단종을 섬기던 10명의 궁녀도 충절을 지키러 궁을 떠나 단종에게로 왔다. 6명은 단종이 있는 청령포로, 나머지 4명은 그의 부인 송 씨에게로 가서 단종을 대신해 그녀를 보살폈다. 단종의 복위 운동을 했던 생육신인 권란 원호는 관직을 다 버리고 영월로 내려와 주천강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으며 영월의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마다 이 강을 헤엄쳐 건너와 단종에게 문안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두 달 남짓 됐을 때쯤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면서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됐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단종을 건져줄 이가 없자 단종은 앞장서서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한이라는 것을 몰라도 될 열일곱 단종. 그는 이곳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앉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피를 토하여 우는 자규새(두견새)에 빗대어 ‘자규시’를 지어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전해진다.
그러던 중 한양에서는 단종의 작은아버지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사됐고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통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왕방연이 차마 이것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찰나 명예에 눈이 먼 공생(貢生) 복득(福得)이가 자처해 한 가닥의 활화살 줄로 단종을 교살(絞殺)함으로써(‘병자록’ 기준) 1457년 10월 20일 슬픔과 한이 서린 가여운 인생은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마침표를 찍었다.
(글: 이승연 기자 / 사진: 최성애 기자 / 영상: 손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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