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문화재 숲 ‘영월ㆍ정선’

단종의 한 보듬은 ‘영월’, 우리네 한을 노래한 ‘정선’

한민족의 삶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한(恨)을 얘기한다. 때론 외세에 짓눌려서, 때론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더 자주는 가진 자들의 농락에 희생된 우리네 선조들의 거칠고 둔탁한 인생이 그렇게 한을 대물림했다. 우리네 恨과 마주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어린 나이에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강탈당하고 열일곱에 세상도 등져야 했던 어린 임금 단종의 흐느낌이 있는 ‘영월’과 그 너머 서민들의 애환을 노랫가락으로 풀어냈던 ‘정선’으로 향했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숲과 모래톱, 기묘한 절벽, 굽이치는 강이 만들어낸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꼬불꼬불하며 험한 산길을 이르는 말), 야생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자연 그대로의 도시로 불리는 ‘영월’.

많은 아름다운 수식어를 가진 영월을 처음 본 느낌은 “한 폭의 산수화에 들어온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다.

‘비운의 임금’ 단종의 흔적을 찾아

▲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의 비사와 전설이 얽힌 '청령포'.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정해졌다(위). / 왕방연(王邦衍) 시조비(詩調碑)(아래 좌). / 청령포에 대해 설명하는 김은영 문화관광해설사(아래 우) (출처: 영월군청)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월은 ‘발길 닿는 곳마다 단종의 고혼과 그를 따르던 충신들의 넋이 살아 숨 쉰다’고 말할 정도로 단종과 많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단종의 흔적을 더듬어 보려 청령포를 찾았다.

태어나면서 어머니 현덕왕후 권 씨를 잃고, 12살에 아버지 문종마저 승하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조선 6대 왕에 즉위한 단종. 그나마도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비참하게 강원도 영월 땅으로 쫓겨나게 된다.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할 수 있었던 2살 연상인 부인 송 씨와도 생이별이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 영월 백성들은 유배 오는 단종을 맞이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단종의 흔적을 찾아 도착한 곳은 영월군 남면 광천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청령포’. 하지만 장마로 불어난 물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는 곳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며 문화관광해설사의 입을 통해 그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단종을 그리던 충신과 영월 백성들의 애틋한 마음이 조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해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곳으로 동?남?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천연 감옥’과도 같은 형태다.

풍수에 능했던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마치 섬과도 같은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고 단종은 적막한 이곳에서 쓸쓸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집 뒤 험준한 산에 올라 경복궁 쪽을 바라보며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을 생각하기도 하고 부인 송 씨를 눈물로 그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돌탑을 쌓았다. 이 돌탑 ‘망향탑’이 다종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이런 단종의 모습을 옆에서 보았고, 그가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는 수령 600년이 넘은 소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단종은 이 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고 한다. 또 관음송의 가지들은 독특하게 뒤틀려 있는데 김은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를 “단종이 가슴을 치며 통곡할 때 그것을 지켜보던 관음송도 함께 아파한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단종이 유배를 가게 되자 한양에서 단종을 섬기던 10명의 궁녀도 충절을 지키러 궁을 떠나 단종에게로 왔다. 6명은 단종이 있는 청령포로, 나머지 4명은 그의 부인 송 씨에게로 가서 단종을 대신해 그녀를 보살폈다. 단종의 복위 운동을 했던 생육신인 권란 원호는 관직을 다 버리고 영월로 내려와 주천강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으며 영월의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마다 이 강을 헤엄쳐 건너와 단종에게 문안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두 달 남짓 됐을 때쯤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면서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됐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단종을 건져줄 이가 없자 단종은 앞장서서 궁녀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한이라는 것을 몰라도 될 열일곱 단종. 그는 이곳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앉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피를 토하여 우는 자규새(두견새)에 빗대어 ‘자규시’를 지어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전해진다.

그러던 중 한양에서는 단종의 작은아버지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사됐고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을 통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왕방연이 차마 이것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찰나 명예에 눈이 먼 공생(貢生) 복득(福得)이가 자처해 한 가닥의 활화살 줄로 단종을 교살(絞殺)함으로써(‘병자록’ 기준) 1457년 10월 20일 슬픔과 한이 서린 가여운 인생은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마침표를 찍었다.

(글: 이승연 기자 / 사진: 최성애 기자 / 영상: 손성환 기자)

(고품격 문화월간지「글마루」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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