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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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큰 태풍이 아니었는데도 점차 다른 기상 이변과 결합하면서 급기야 엄청난 태풍으로 몰아치는 경우가 있다. 말 그대로 완벽한 태풍,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다. 유명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또 혹자는 영화 제목으로 더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로 경제 용어로 사용된다. 하나의 경제 위기가 다른 위기들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최근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퍼펙트 스톰’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필자도 몇 년 전, 본지에 ‘퍼펙트 스톰과 정치의 위기(2018.12.17)’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차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실패’와 ‘경제의 무능’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3년이 흘렀다. 그사이 정치의 실패는 ‘전쟁’이 돼 버렸고, 경제의 무능은 ‘참사’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레임덕 현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더 무능한 야당’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팬데믹 위기 속에서도 나름 선전하고 있는 우리 정부와 대한민국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며, 그리고 언제까지 자존감 등으로 버티기에는 우리의 현실적 고통이 너무 크다. 아파트값 폭등은 대부분의 국민들을 ‘루저’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청년들의 분노와 절망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살려 달라’는 영세 상인들의 호소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비명’에 다름 아니다. 이 와중에 ‘LH 투기’에 이어 ‘대장동 투기’까지 터졌다. 이제는 국민적 인내의 한계를 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태산처럼 몰려온다. 정말 큰 것이 터질 것 같은 그런 두려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의 결정적 한 마디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정 원장은 지난 28일 임원회의에서 “최근 국내외 리스크로 인해 주식, 부동산, 외환, 가상자산시장에서까지 변동성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며 “상호연계성과 상승작용으로 인해 파급력이 증폭하는 ‘퍼펙트 스톰’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책임 있는 인사가 직접 언급한 발언이기에 그 무게감은 더 크다. 게다가 이런 경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제사회는 물론 국내외 전문가들도 이미 한국경제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수없이 반복해 왔다. 특히 18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 빚’이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국내외 금융시장에 엄청난 양의 유동성이 풀리면서 자산시장에 거품이 너무 커져 버렸다. 이젠 테이퍼링을 하는데도, 또 금리를 올리는데도 조심조심 하지 않으면 자칫 시한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이대로 가기엔 자산시장의 거품이 이미 임계점에 이른 상황이다.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서 어렵사리 버텨내는 형국이다. 여기에 우연찮게도 팬데믹이 잠시라도 기댈 언덕이 돼 준 셈이다. 하지만 그 언덕마저 이젠 무너지고 있다는 데서 ‘퍼펙트 스톰’의 경고를 심각하게 경청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나라 안팎의 불안한 소식들이 ‘퍼펙트 스톰’의 전조가 아니길 바라지만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테이퍼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며,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문제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29일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서 국가부채 한도를 올리지 않으면 금융위기와 재앙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경제 수장이 미국 의회에서 미국의 국가부도 사태를 언급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경고성 압박의 의미가 강하지만 미국발 경제위기가 또 발생할 경우 한국경제는 더 위험하다는 점이다.

이 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상황은 더 불안하다. 미중 패권투쟁이 연일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엔 헝다그룹 사태가 터졌다. 당장은 우리 경제에 큰 피해가 없겠지만, 중국 부동산 시장의 붕괴가 가시화될 경우 국내 부동산 시장도 안심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중국 부동산 부문의 부실 우려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또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추가 인상을 압박하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의 전력난이 워낙 심해 일부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고 있다. 혹여 중국의 경기침체로 이어진다면 그 역풍은 그대로 한국경제를 위협할 것이다. 이래저래 한국경제를 둘러싼 굵직한 대외변수는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인다는 얘기다.

다시 한국경제를 위협하는 ‘퍼펙트 스톰’ 얘기로 돌아 가보자. 정은보 원장은 지난 8월 취임사에서도 한계기업의 줄도산이나 자영업자의 부실 확대, 그리고 자산시장 거품 붕괴 등의 우려가 제기되자 다양한 리스크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퍼펙트 스톰’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정 원장도 그 핵심 원인을 과도한 유동성 공급으로 꼽았다. 지금 시중엔 돈이 넘쳐 나고 있다. 이에 따라 물가상승이나 인플레도 우려되지만, 오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유동성이 한국경제의 ‘약한 고리’를 때린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시한폭탄의 폭발에 다름 아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빚은 부동산 정책의 완패는 이미 ‘가계 빚’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자칫 단 한 번의 작은 위기가 또 다른 위기로, 그리고 더 큰 위기로 진화하지 못하도록 지금부터라도 선제적인 대응조치가 너무나 절박해 보인다. 굳이 ‘하인리히 법칙’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옆에 폭탄이 있다면 그 도화선에 불이 붙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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