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된 제주사람들 (제공: 제주4.3희생자유족회)
4.3사건 당시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된 제주사람들 (제공: 제주4.3희생자유족회)

희생자 유가족 “외조부 명예회복 못 이뤄”

“보상도 받지 못해 너무나 억울하고 슬퍼”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국가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 없이, 형제들도 없이 저를 혼자 키우셨어요. 하지만 국가로부터 보상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종되신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명예회복도 못하셨고 죄인으로 남아계신 상황입니다….” - 제주4.3 희생자 유가족

21일 온가족이 함께 정을 나누는 민족 고유의 명절을 맞았지만 제주4.3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긴 했지만 해당 법안은 제주4.3에 대한 ‘해결 완료’가 아니고 출발점이었다.

앞으로 이 법안을 적용한 희생자들에 대한 위자료 지원과 수형인들에 대한 일괄 재심, 추가 진상조사 등이 과제로 남아있다. 다만 정부가 과제를 수행하는 사이 억울한 사연을 간직한 채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사람들이 있기에 해결이 시급한 상황이다.

제주4.3 희생자 유가족인 김성훈씨는 제주4.3으로 인해 조부와 외조부를 잃었다. 김씨는 조부에 대한 재심청구를 통해 1948년 12월 15일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던 것을 올해 3월 24일 ‘무죄’ 판결로 바꿀 수 있었다. 조부의 잃었던 명예를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외조부는 달랐다. 제주4.3으로 인해 죄인으로 잡혀간 상황, 이후 실종된 상황 등 외조부도 조부와 마찬가지였으나 재심이 이뤄지지 못했다. 외조부의 대리인인 모친은 파킨슨병을 심하게 앓고 있어 소송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김씨는 “나와 같은 비슷한 사례가 많이 있을 것이다. 보상도 받지 못하고 너무나 억울하다”며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형제들도 없이 어렵게 크셨다.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할아버지고 외할아버지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정부는 이러한 죽음을 외면했다.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2007년 12월 4일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에서 뒤로 손이 묶인 채 발견된 유해. (제공: 제주 4.3 연구소)
2007년 12월 4일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에서 뒤로 손이 묶인 채 발견된 유해. (제공: 제주 4.3 연구소)

◆제주4.3, 무고한 목숨 앗아간 근현대사의 비극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 전 지역에서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에 발생한 ‘3.1절 발포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한 한 아이가 말을 탄 응원경찰에 치이게 되고 그 경찰이 그냥 가버리자 사람들은 돌을 던졌다. 이에 경찰은 이들에게 발포를 했고 6명이 사망했다. 그 6명은 농부 4명과 학생 1명, 젖먹이 안은 여인 1명이었다.

이후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 합동 파업이 진행됐다. 총파업에는 미군정에서 일하던 인원, 경찰 등도 동참해 유례없는 합동 파업이며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측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곳 중 12곳과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습격해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의 비극이 시작됐다. 남로당 무장대는 주요 거점을 치고 빠지는 형식의 전술을 취해 소위 ‘빨치산’이라 불렸다.

이들이 산으로 도망 다니면서 쉽게 토벌되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강경 진압을 시행했다. 당시 토벌대 중에서 가장 악랄한 평가를 받은 단체는 ‘서북청년회’와 소속 대원이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좌익과 연관돼 있다”며 무참히 학살했다.

초토화 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됐다. 학살 행위는 군경토벌대 뿐 아니라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이유로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하고 끝나갈 무렵 무장대가 대부분 토벌됐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며 무고한 양민 학살의 대참극의 총성은 멈췄다.

◆강간·방화·살인 자행한 ‘서북청년회’

제주4.3사건과 민간학살의 중심에 ‘서북청년회’가 있었다. 보수 우익이 정권을 주로 정권을 잡았던 2000년도 이전의 시기에 서북청년회는 공산당을 토벌한 그야말로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진상 조사가 시작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희대의 만행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서북청년회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조사 결과 그들은 잔인한 테러와 방화, 강도, 강간, 절도, 고문, 폭행, 살인 등 학살의 중심에 섰다. 서북청년회의 구성원 중 상당수가 개신교인이었다는 점도 충격을 줬다.

한국교회가 추앙하는 고(故) 한경직 목사는 미군정 시절 민간인 학살의 선봉장이었던 ‘서북청년회(서청)’의 회원이었던 영락교회 청년들의 영적 지도자였다.

한 목사는 자서전인 단행본 ‘한경직 목사’에서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어요.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라고 말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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