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학생들 모습(1910년). 흰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흑백의 유리원판 위에 선교사가 파란색과 노란색을 사용해 색을 입혔다는 점이다. 배경이 되는 담장이나 나무 역시 놓치지 않고 색을 입혀 시각적인 효과를 더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있는 여성의 경우 안경을 쓴 것까지 자세히 표현된 것이며, 독특한 머리 모양, 발그레한 뺨까지 정성들여 채색한 흔적이 보인다. 유리원판에 색을 입힐 때는 한 번의 붓질로 완성해야 하는데 이는 색을 덧칠하게 되면 투과율이 떨어져 슬라이드용으로 부적합해지기 때문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이화학당 학생들 모습(1910년). 흰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흑백의 유리원판 위에 선교사가 파란색과 노란색을 사용해 색을 입혔다는 점이다. 배경이 되는 담장이나 나무 역시 놓치지 않고 색을 입혀 시각적인 효과를 더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있는 여성의 경우 안경을 쓴 것까지 자세히 표현된 것이며, 독특한 머리 모양, 발그레한 뺨까지 정성들여 채색한 흔적이 보인다. 유리원판에 색을 입힐 때는 한 번의 붓질로 완성해야 하는데 이는 색을 덧칠하게 되면 투과율이 떨어져 슬라이드용으로 부적합해지기 때문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우리 민족의 옛 모습과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몇 장을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1900년대 초 컬러 사진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것으로 100년 전 이화학당 학생들의 모습과 조선 여인들의 아들자랑 풍습에 관련된 사진이다

사진은 당시의 시대상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사료다. 동시에 카메라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합성수지(플라스틱)로 제작된 필름이 나오기 전에 사용됐던 유리원판 필름으로 제작된 것으로 1900년대 컬러 사진의 진수를 알 수 있는 사진이다.

유리원판 필름의 경우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인화용이 주를 이뤘지만, 선교사업 및 교육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슬라이드로 제작된 필름도 적지 않다.

당시의 유리원판 필름은 감광도가 매우 낮은 건판으로 0.2㎜ 유리판에 감광재료를 바른 후 젤라틴 막을 입혀 만들었다. 이 유리판을 이용해 촬영하면 실상과 반대인 네거티브(음화)로 찍히는데 이것을 다시 실상과 같은 포지티브(양화)로 반전시킨 후 그 위에 색을 칠해 컬러 유리원판으로 만든다.

이때 채색은 최대한 얇게 해야 한다. 환등기(슬라이드용 영사기, 그림이나 사진 등을 영사막에 확대 투사하는 광학기구)에 돌리기 위해서는 빛이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생각하면 쉽다. 이렇게 색을 입힌 유리원판 필름에 또 다른 유리를 덧씌워 일명 ‘샌드위치’를 만든 후 4면을 테이프로 봉하는데 이는 습기, 지문, 오염으로부터 원판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화학당 유치원(191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이화학당 유치원(191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이화학당유치원, 1910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여교사, 어린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유치원에 다닌다는 것은 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 또한 슬라이드용으로 제작된 유리원판에 촬영 당시의 의복 색상을 기억한 후 마치 복사하듯 색을 입힌 것으로, 당시 컬러 사진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사진이다. 외국인 선교사 앞쪽에 서 있는 여자 어린이의 색동저고리까지 표현할 정도로 채색의 수준이 놀랍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의 풍습을 세계에 알리고, 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곤 했는데 100년 전 그들이 남긴 사진이 우리의 풍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여학생 교리반(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여학생 교리반(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여학생 교리반, 1900

흑백으로 촬영했다. 일부 다른 색상으로 보이는 것은 당시 학생들이 색상 있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상태에서 색을 입혀 컬러사진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채색을 통해 컬러사진으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정교한 작업을 거쳐 컬러사진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돼 왔음을 짐작케 한다.
 

 

교우 가정(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교우 가정(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천주교 교우 가정, 1900

한국인 천주교 가족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엽서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성경을 들고 손을 합장하여 기도 올리는 장면이다. 당시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가정을 사진을 통해 보고 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속설이 있던 터라 앞줄의 어린이들과 뒤쪽 할머니의 시선이 자못 재미있다.
 

 

여인들의 아들 자랑 풍습(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여인들의 아들 자랑 풍습(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조선 여인의 아들 자랑, 1900

아들 자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보이고 있다. 이런 풍속은 어느 지방에 있었던 풍속을 고종황제 전의 미국인 에비슨 일기장에서 처음 소개됐다. 사진을 처음 본 한국 여성들은 한국 여성의 삶을 왜곡시킨다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릴 만큼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민족이, 그것도 품행과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인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노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여인의 아들자랑’ 사진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진이 공개될 당시 민속학자나 민속의상연구가 등은 “말도 안 되는 사진”이라며 “100년 전에는 저고리가 짧은 것이 유행했던터라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사진을 공개했던 정성길(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이 사진은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아들 낳은 것을 알리기 위해 젖가슴을 드러낸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여인들의 아들 자랑 풍습(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여인들의 아들 자랑 풍습(1900년).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9.19

조선 여인의 아들 자랑, 1900

세 명의 연인이 비슷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다. 저마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모습이지만 두 여인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한 여인은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민속학자나 민속의상연구가들은 저고리와 옷고름이 짧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가슴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지만, 같은 상황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 사진을 통해 당시의 아들 자랑 풍속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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