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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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했다. 망국에 순국열사가 없지는 않았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권의 ‘순국 의사’ 조에는 순국 의사 29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금산군수 홍범식,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판서 김석진, 내관 반학영, 참판 송도순, 정언 정재건,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등.”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목매어 자결했고,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권총 자결,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도는 안동에서 단식하다 순국했다.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판서 김석진은 음독 자결했으며, 환관 반학영은 파주에 은거 중 할복 자결했다.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도 9월 10일에 전라도 구례 자택(지금의 매천사)에서 유서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국했다.

“나는 국가에 녹을 먹지 않아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경남일보 주필 장지연은 10월 11일 자 경남일보에 황현의 자결 소식과 함께 절명시 4수를 실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 이미 가라앉아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곰곰이 생각하니/ 글 배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10월 15일부터 정간돼 10월 25일에 속간됐지만 1914년에 폐간되고 말았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도 여럿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서울 명동 일대의 가산을 모두 정리한 돈 600억원을 들고 중국 서간도로 망명했고, 안동의 이상룡 일가도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갔다. 이건승·정원하·홍승헌 등 강화학파 선비들도 압록강을 건넜다.

8월 29일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조서(詔書)를 내렸다.

“짐이 동양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여 제국의 안전을 장래에 보장함을 생각하며, 또 항상 한국이 화란(禍亂)의 근원 됨을 돌아보아 지난번에 짐의 정부로 하여금 한국 정부와 협정하게 하고 한국을 제국의 보호 아래 두어 화의 근원을 두절하고 평화의 확보를 기하였다. 그 이래 4년 남짓 지나 짐의 정부는 한국의 시정개선에 확고한 의지로 노력하여 그 성적이 볼 만하였으나, 한국의 현 제도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니 의구의 염이 늘 국내에 충일하여 백성이 그 울타리에서 편안치 못하니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여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을 위할진대 현 제도의 혁신을 피하지 못함이 뚜렷하였다.

이런 사태를 보고 짐은 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이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하다고 생각하여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고,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한국을 강점한 것이 동양 평화와 한국인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라는 메이지의 조서에 화가 치민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다. 이윽고 메이지 천황은 여러 개의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 제318호

한국의 국호(國號)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

칙령 제319호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후략)

(순종실록 부록 1910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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