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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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1472~1528)은 주희 이후 최대학파인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이자, 뛰어난 군사전략가였다. 절강성 여요(餘姚) 출신으로 호를 양명이라 했다. 아버지 왕화(王華)는 전시 1등급제자로 남경 이부상서를 역임했다. 21세에 상경해 주희의 격물치지를 공부했다. 왕수인은 대나무를 잘라서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이치를 알 수 없었다. 대나무 관찰이 ‘격물’이다.

실망한 그는 문장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도를 깨우치지 못했다. 다시 도전한 주희의 학문은 의문투성이였다. 좌절한 그는 입산까지 결심했다. 그 사이에 진사가 됐으나, 구도에 대한 염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신선술에 심취하거나 출가도 생각했지만, 가족 때문에 병부주사로 근무했다. 권력인 환관 유근(劉瑾)이 언론을 탄압하자 반박 상소를 올렸다가 귀주(貴州) 용장역(龍場驛)으로 유배됐다.

왕수인은 유근의 암살시도를 피해 간신히 유배지에 도착했다. 용장은 지독한 오지였다. 왕수인은 혹독한 귀양살이에서 홀연히 성인의 도가 이미 사람의 성(性)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희의 격물치지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도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있었다. 주희의 객관적 진리와 왕수인의 주관적 진리가 양립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유근이 주살된 후에 복직했다. 왕수인이 강서순무로 있던 1519년 6월, 영왕(寧王) 주환호(朱寰濠)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파양호를 출발해 안경(安慶)을 위협했다. 왕수인은 8만의 군대를 이끌고 풍성(豊城)에 주둔했다. 작전회의에서 추관(推官) 왕휘(王暉)가 의견을 제시했다. “영왕이 안경을 공격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함락하지 못합니다.

영왕의 군대가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출전해 안경의 수비군과 협공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안경에서 주환호의 군사들을 격파한다면 남창을 손에 넣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습니다.”

장수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왕수인이 말했다. “왕군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아군이 안경을 공격하려면 반군이 지키는 남창을 지나야 한다. 남창을 통과하다가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안경에 도착해도 반군과 강에서 대치해야 한다. 그렇다면 승부는 알 수 없다.

안경의 아군도 지쳐서 협공할 상태인지 모른다. 이런 대치상황에서 남창의 적이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하면, 우리가 오히려 협공 받게 된다. 먼저 반군의 소굴 남창을 공격해야 한다. 영왕의 주력은 지금 안경에 있으니, 남창에는 병력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남창이 위험하면, 영왕은 근거지를 지키려고 회군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경의 포위는 저절로 풀린다.우리가 먼저 남창을 점령하면 반군의 사기는 금방 떨어질 것이다. 승세를 타고 우리가 영왕의 주력부대를 공격하면 대승을 거둘 것이다.”

남창으로 진격할 때 반군이 남창에 미리 복병을 숨겨뒀다고 보고했다. 왕수인은 5천의 기병을 파견해 반군의 복병을 격파했다. 고립된 남창 반군의 저항이 점차 약화됐다. 안경의 수비군도 완강하게 버텼다.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남창이 위험하다는 연락이 왔다. 놀란 영왕이 급히 남창으로 철군하려 하자 반군의 모사가 간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리 남경으로 군사를 돌리는 것이 낫습니다.”

“남창은 우리의 근거지이다. 모아둔 군자금이 대부분 거기에 있다. 남창을 수복해 그것을 탈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리 매복한 왕수인은 반군의 선봉이 포위망으로 들어오자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 영왕은 전선을 모아 방진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버텼다. 왕수인은 화공을 퍼부었다. 영왕의 전선은 모두 불타버렸다. 그것으로 반란은 깨끗이 진압됐다. 눈앞에 보이는 격물치지를 넘어 본질을 파악하는 인식능력의 작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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