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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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정권 수립 73주년(9·9절)을 맞아 9일 0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심야 열병식을 개최했다. 지난해 10월, 올해 1월에 이어 채 1년도 안 돼 세 번이나 심야 열병식을 개최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가히 ‘열병식 정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내부 결속을 다지는 한편, 바이든 미국 행정부를 향해 군인뿐 아니라 주민의 국가 수호 의지를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3돌 경축 민간 및 안전무력 열병식이 수도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열병식에 참석한 사진도 공개됐다. 이날 김 위원장의 얼굴은 선분홍 빛이 돌았다. 회색 정복의 바지 밑단이 펄럭일 정도로 품이 넉넉했다. 최근 다이어트에 성공한 그가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는 징후다. 지난달 31일 공개된 청년절 경축행사 사진에서도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늦은 저녁 또는 자정 시간에 열병식을 진행하는 것은 김정은 정권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다. 김정은 시대에서 확실하게 바뀐 통치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 ‘열병식 정치’다. 북한은 이전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주로 오전 10시에 열병식을 개최해왔다.

만성적인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은 굳이 왜 숱한 조명 등에 따라 상대적으로 전력이 더 소비되는 심야시간을 택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수 천 개의 조명으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주석단에서 연설을 하는 김 위원장이 조명으로 부각되는 ‘히틀러식’ 선전·선동 효과 등을 노렸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은 이와 더불어 김정은 시대 ‘심야 열병식’ 개최의 또 다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은 ‘민심이반’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군인들 뿐 아니라 평양주민들을 수 만 명씩 동원하는 북한 열병식 특성상 심야시간이 현실적으로 이들의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대라는 분석이다. 실제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열병식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한 탈북민에 따르면 열병식에 동원되는 경우 약 10시간 전부터 대기를 해야 한다.

열병식 연습 역시 최소 2~3개월은 해야 했다. 특히 기존처럼 오전 10시에 열병식이 진행되는 경우 전날 밤잠을 한숨도 못 자게 된다. 밤을 꼬박 새우며 열병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병식 전 이들은 대략 ‘D-10시간’ 시점인 전날 밤 10~12시에 보통강 구역에 집합한다.

이곳에서 도보로 1시간 30분을 이동해 김일성 광장 인근에 있는 유명 식당 ‘옥류관’ 앞에서부터 행진을 위한 대오를 갖춘다. 참가하는 인원 규모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 대오는 보통 2km 떨어진 평양개선문까지 늘어서게 된다. 이후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거친다. 새벽 4시가 되면 보위부원들은 금속탐지기로 수 만 명의 참가자들의 몸을 일일이 수색한다. 혹시 모를 생리현상을 막기 위해 아침 6시부터는 일체의 식음이 금지되기도 한다. 이후 또다시 대오 정렬을 하고, 입장을 위해 대기하는 데 또 2~3시간이 소요된다. 심야시간 열병식 개최를 위해 미국을 벤치마킹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재결속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려한 불꽃놀이와 에어쇼로 전 국민이 축제 분위기에 매료되는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에 착안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지난해 미국으로부터 미 독립기념일 행사 모습을 담은 DVD를 요청했던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김여정은 지난해 7월 10일 대미 담화를 발표하면서 말미에 “가능하다면 앞으로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 한다는 데 대해 위원장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담화가 “조미수뇌회담(북미정상회담)과 같은 일이 올해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을 압박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엉뚱한 요청이었다.

이번 열병식의 경우 트랙터 등이 등장하는 민간무력 즉 방어병력 종대들의 퍼레이드인데 이것은 결국 김정은 정권이 대외적 공격보다 내부 방어에 주력하겠다는 의지 천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굳이 대미 대남 공격능력도 없으면서 허풍 떨 필요 없다는 자세변화라고 본다. 아무튼 김정은 정권이 ‘주제파악’을 했다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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