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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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에 조인된 한일병합조약은 1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포됐다. 을사늑약 같은 조약들은 즉시 공포됐는데 왜 이 조약은 1주일 뒤로 공포가 미뤄졌던 것일까?

‘한국 근대사 강의’ 책에는 ‘일본은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해 조약 체결 사실을 1주일간 극비에 붙였다가 29일에야 발표했다’고 적혀 있다(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국근대사강의, 2013, p287).

그런데 일본에 망명 중인 양계초는 1910년 9월 14일에 ‘국풍보(國風報)’에 게재한 ‘일본병탄 조선기’에서 이렇게 썼다.

“합병 조약은 22일에 임시 추밀원 회의를 열어 25일 공포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갑자기 8월 28일 순종 즉위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한 뒤 발표하기를 청하자, 일본인들이 허락했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량치차오 지음·최영욱 옮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2014, p164).”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서울 남산 밑 일본인 거주지에는 집집마다 일장기가 게양되고 시내 곳곳에는 오색등이 설치돼 저녁에 있을 등불 행렬을 준비했다. 일본이 동원한 인파 약 6만여명은 총독부를 비롯한 총독·정무총감·경무총감·군사령관의 관저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하며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바뀐 것을 축하했다.

이 날 종로 거리의 한국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사를 하고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평소의 모습을 보였다(김태웅·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2019, p 433).

양계초는 1910년 9월 14일에 ‘국풍보’에 발표한 ‘조선 멸망의 원인’에서 이렇게 적었다.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더구나 고관들은 날마다 출세를 위한 운동을 하고, 새 조정의 영예스러운 작위를 얻기를 바라며 기꺼이 즐겼다(량치차오 지음, 위 책, p100).”

8월 29일에 순종이 칙유했다.

“짐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하는 것에 관해 누차 도모하고 갖춰 시험해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만회할 가망이 없으니 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지라. 이러한 일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확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대소신민(大小臣民)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해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해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활하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순종실록 1910년 8월 29일).”

순종, 참으로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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