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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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국가인 중국에서는 농민기의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은 근세의 태평천국이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 양수청(楊秀淸), 위창휘(韋昌輝), 석달개(石達開) 등은 광서성 금전촌(金田村)에서 농민무장봉기를 일으켜 태평천국을 세웠다. 이들은 일거에 광서, 호남, 호북을 휩쓸었다.

양자강의 요충지 무창을 점령하고, 동진해 남경을 탈취한 후 수도로 정하고 천경(天京)이라 불렀다. 역대 농민기의는 최대의 적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태평천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홍수전은 천하가 모두 형제와 자매라고 떠들었지만, 천경정도 이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천경에서 그가 맨 처음 한 것은 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곳곳에 정교한 조각을 하고 금빛이 찬란한 건물을 지었으며, 왕부 주위에 10여리에 달하는 담장을 쳤다고 한다. 두 겹인 담장의 높이가 수 장이나 됐다고 하니 태평은 고사하고 누군들 가까이 가기나 했겠는가? 매일 미녀들을 끼고 황음무도했으니 어느 전제군주에 못지않았다.

더욱 황당한 일은 그들끼리의 권력다툼이었다. 처음 머리를 쳐든 사람은 동왕 양수청이었다. 초기에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그것을 믿고 홍수전까지도 무시했다. 걸핏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강림했다는 천부하범(天父下凡)을 구실로 홍수전을 압박했다.

심지어 홍수전이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고 공개적으로 매질까지 하려고 했다. 홍수전이 왕부를 짓자 그도 동왕부를 지었다. 동왕부의 호화로움은 천왕부에 못지않았다. 그는 홍수전이 천왕 노릇을 하는 것을 못마땅했다. 결국 홍수전에게 자신을 ‘만세(晩歲)’에 봉하라고 압박했다. 양수청의 방자함에 위창휘가 제동을 걸었다.

홍수전은 위창휘와 결탁해 양수청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1853년 9월 1일 새벽, 그들은 양수청을 죽이고 그의 일당을 모두 제거했다. 환란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의형제끼리 불공대천의 원수로 변했다. 이 때 태평천국의 청년명장 석달개는 전선에서 천경으로 돌아와 있었다. 형제들끼리 살육전을 본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위창휘를 비난했다.

위창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석달개까지 죽이려고 했다. 석달개는 밤중에 천경을 떠났지만, 남은 가족들은 피살됐다. 석달개는 즉시 위창휘 토벌군을 일으켜 위창휘를 죽이지 못하면 천경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홍수전의 측근에 있는 것이 곤란하다고 생각한 위창휘는 그를 죽이고 자립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미리 알아차린 홍수전은 위창휘를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석달개가 위창휘를 죽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석달개도 믿지 못했다. 그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의 두 형을 왕으로 봉해 사사건건 석달개에게 시비를 걸었다. 홍수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석달개도 마찬가지였다. 석달개는 군사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석달개의 이탈은 태평천국 군사력에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그가 이탈하자, 천경에는 군사력을 가진 장수라고는 한 사람도 없게 됐다. 태평천국은 급격히 지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청군이 아니었다. 청군은 태평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강북과 강남에 각각 병영을 설치하고 수만 명씩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강을 사이에 두고 청군이 교통과 보급로를 차단하자 천경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게다가 호남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중국의 사대부층이 결집되고 있었다. 증국번(曾國藩)은 기독교를 앞세워 유가의 강상윤리를 파괴하는 홍수전을 적으로 간주했다. 그가 일종의 민병대인 상군(湘軍)을 조직하자, 이홍장도 회군(淮軍)을 조직해 호응했다.

이러한 정황에서 홍수전은 홍인간(洪仁玕), 이수성(李秀成), 진옥성(陳玉成) 등의 장수들을 중용했다. 간신히 평정을 찾았지만 수뇌부끼리 잔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천경에는 여전히 암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모든 전쟁은 적의 세력을 줄이고, 아군의 세력을 강화하는 게임이다. 태평천국은 내분으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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