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not caption

대선정국이 본격화 되다 보니 정치권 안팎에서 상식 밖의 일들이 쏟아지고 있다. 5년 만에 ‘대통령 선거’라는 선거정치의 큰 장이 열리니 그동안 숨죽여 있던 수많은 군상들이 장마당으로 뛰쳐나와 천태만상의 언행들을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 중에는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듯 편향과 무지, 독선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 ‘불량배’ 같은 이들도 있고, 스스로 결백하다는 듯 이런저런 핑계로 핵심을 비켜가면서 마치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꾼’도 많다. 모처럼 만에 그런 군상들의 천태만상을 보면서 우리 정치의 현주소, 일부 정치인들의 실체 그리고 인간의 추함과 존귀함을 동시에 목도하고 있다.

정치는 그 절반이 ‘말(담론)’이다. 말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말로써 세력을 규합하고, 또 말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아내는 과정이 곧 ‘정치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치인의 말은 그 사람의 정치역량 가운데 으뜸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메시지를 어떻게 작성해서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그리고 국민과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의 공감 능력을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어 갈 것인지 등은 정치역량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이 부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정치 커뮤니케이션론’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미 기본이 된 지 오래다.

정치인의 말은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해 전달된다. 언론이 무엇을, 어떻게 또 어떤 시각으로 국민에게 전달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정치인이 언론을 대하는 자세는 바로 국민과 만나는 방식과 다름 아니다. 국민은 특정 언론의 기사나 보도를 보고 특정 정치인의 말과 메시지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기자 또한 그 직업의 특성상 국민을 대표하는 직업이다. 기자 본인의 사적인 관심이나 자신이 속한 언론사를 위해 현장을 뛴다고 생각하는 기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한순간이라도 기자를 만날 때는 국민과 만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국민, 그리고 언론의 상호관계를 이해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의 철칙 가운데 핵심이다.

기자회견은 정치인이 언론을 통해 국민과 만나는 ‘정치담론의 꽃’이다. 국민의 주목을 이끌어내고 기자들이 대거 참석해서 특정 정치인의 말과 메시지를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아주 특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각종 기자회견은 늘 관심의 대상이 돼 왔다. 특정 정치인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도 하고 반대로 지지율 폭락의 계기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기자회견 자리는 당사자의 충분한 준비는 물론이요, 진정성 있는 태도와 국민과의 만남이라는 정중함이 전제돼야 한다. 이 또한 정치인이면 알아야 할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 재직 시의 검찰 발 ‘고발 사주’ 의혹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마치 대선정국의 뇌관이 터진 듯 국민적 관심이 온통 여기에 집중돼 있다. 관련 기사도 매일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물론 윤석열 전 총장이 유력한 대선주자라는 점도 그 원인이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의혹의 핵심 내용이 워낙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선 직전에 현 정권과 각을 세웠던 검찰총장이 측근들을 시켜 여권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고발을 야당에 사주했다는 것은 충격을 넘어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검찰 발 ‘국기문란’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당사자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을뿐더러 무엇이 사실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련 사건에 연루돼 있는 당사자들, 특히 정치인들의 처신은 매우 중요하다. 국민 앞에 진실을 밝혀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로부터 고발장을 받아 자신이 속한 야당(국민의힘)에 전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웅 의원이 마침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이기에 언론은 물론 국민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자회견은 ‘맹탕’에 다름 아니었다. 진실을 향한 접근보다는 마치 법규를 이러 저리 빠져나가려는 듯한 ‘기교’와 결정적인 문제에서는 ‘기억 상실’을 강조하더니 급기야 나는 모르니 다른 사람들을 조사하라는 엉뚱한 주문까지 내놓았다. 무책임과 ‘법꾸라지’라는 비난이 나온 배경일 것이다. 그럴 바에는 굳이 기자회견을 왜 했는지, 이를 지켜본 국민은 분노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다. 결국 진실은커녕 혼란만 더 가중시키고 말았다.

김웅 의원의 맹탕 기자회견에 고무된 것일까. 윤석열 전 총장의 긴급 기자회견은 한 술 더 떴다. 문제의 핵심인 고발장을 ‘괴문서’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정치공작, 한심하다는 등의 지극히 개인적인 심경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게다가 흥분된 목소리로 마치 호통을 치듯 자신의 억울함을 외치더니 급기야 ‘내가 그렇게 무섭냐’며 국민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퍼부었다. 기자회견의 기본조차 망각한 저급한 정치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준 꼴이다. 정말 그 고발장이 괴문서라면 윤 전 총장 자신은 그걸 어떻게 확인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핵심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공작이라고도 했다. 어떻게 해서 정치공작인지도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정치공작이라면 윤 전 총장에게도 결코 불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무섭냐고 물었다. 여당을 향한 것이든, 국민을 향한 것이든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다. 누가 누굴 무서워해서 어떤 정치 행위를 한다는 인식은 시민권에 대한 개념도, 민주정치에 대한 기본인식도 부족할뿐더러 말 그대로 ‘정치검사의 문법’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윤 전 총장이 자청한 긴급 기자회견, 자신의 저급한 수준과 실체를 거듭 확인시켜 준 ‘비극의 현장’을 보는 듯 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