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일 국립중앙박물관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 일환으로 열린 강연회에서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준비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숙종부터 3대 걸쳐 제작된 의궤
왕실 권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문화계에서 올해 최대 화제는 단연 외규장각 의궤 환수다.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가 물려준 국가 유산 ‘의궤’와 조선의 ‘왕정’ 관계를 살펴보는 강연이 22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 일환으로 열린 이번 강연회에서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의궤는 왕실의 사치가 아닌 백성을 보호하고 왕정을 바로 잡기 위해 편찬됐다”며 “소민 보호를 위해 왕권 강화가 이뤄지던 시기에 의궤 제작이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 말했다.

▲ 이태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왕조의 의궤는 숙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양적ㆍ질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각종 의전의 법도를 위한 의궤가 다수 제작된 것은 왕실 자체가 제 모습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붕당 세력으로 왕실의 권위가 손상되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위엄을 갖추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게 이 위원장의 설명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반출됐던 외규장각 의궤는 1991년 10월부터 시작된 반환 운동 결과, 145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991년 반환운동을 시작할 무렵 규장각과 외규장각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규장각이 정조 때 왕실도서관이었다는 내용은 있었으나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정조는 영조의 개혁정치를 이어나가고, 조정의 엘리트들이 지속적으로 왕을 보필할 수 있도록 규장각을 세웠다. 이들에게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등의 근시직을 겸하게 해 왕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권력이 문벌세력에게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 정조는 새로 지은 서책들 가운데 귀중한 것을 국방 안전지대인 강화부에 따로 보관하기 위해 행궁 안에 전각을 새로 지어 ‘외규장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의궤 제작은 정조 시대에 이르러 왕의 행차를 그린 반차도 제작에 박차가 가해진다. 이는 왕이 소민을 직접 만나는 탕평정치의 새로운 지향점을 위해 의궤 제작이 발판이 됐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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