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공자가 ‘춘추’ 집필에 쏟는 열의는 대단했다. 일찍이 공자가 관직에 있을 때는 고소문 하나를 작성하는 데도 동료와 상의를 했으며 혼자서 처리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춘추는 혼자서 집필하고 추고를 했다. 학식이 많은 자에게조차 한 자의 자문도 구하지 않았다.

마침내 춘추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후세에 내가 비난을 받건 칭송을 받건 그것은 모두 이 책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달렸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 공자는 병이 들었다. 공자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그는 문을 들어서는 자공을 보자.
“너무 늦게 오는구나.”
그러면서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뒤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태산은 무너지는가.
기둥은 부러지는가.
철인은 시드는가.-
읊는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그가 읊는 동안 얼굴에는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천하의 도가 상실된 지 오래고 나를 따라 오는 자도 없다. 나는 어제 밤에 안방 기둥사이에 앉아 제물을 받고 있는 꿈을 꾸었다. 기둥 사이라고 하면 관을 안치하는 장소다. 이것은 은나라의 관습이고, 하(夏)나라나 주나라에서는 다르다. 내 조상은 은나라 사람이다.”
그 말을 한 지 7일 뒤에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3세로 노나라의 애공 16년(기원전479) 4월 기축일이었다.

공자는 노나라 도읍의 북쪽 사수 가에 묻혔고 제자들은 모두 3년의 심상(상복 없는 복상)을 치렀다. 상을 마치자 스승의 영전에 모두 모여 곡하며 슬픔을 나누었다. 그리고 모두 헤어졌지만 그 중에는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도 있었다. 자공이었다.

자공은 공자의 무덤 곁에 오두막을 짓고 다시 3년을 복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자의 묘 부근에는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차츰 무리를 지어 옮겨 살게 되어 얼마 뒤에는 가구 수만 1백여 호에 달해 그곳을 공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 공자의 무덤 앞에서 유학자들은 예를 배웠고 향음주의 예(향교에서 배움을 마친 자 중에서 우등생을 뽑아 왕에게 추천하고, 향리의 대부가 송별연을 벌이는 행사)와 대사의 예를 거행했다.

공자 묘지의 넓이는 1백 묘이고 원래 제자들이 있던 건물은 나중에 묘당이 되어 공자의 옷, 갓,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을 넣어 두었다. 그것들은 한나라 대까지 2백 수십 년에 걸쳐 보존되고 있다. 한나라의 고조는 노나라에 들렀을 때 공자의 무덤에 태뢰(소, 돼지, 양, 최고의 제물)를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또 제후나 대신은 이 지방에 오면 먼저 공자 묘당을 찾아 참배를 드리는 것이 순서였다.
공자가 죽은 뒤에도 그를 사모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컸다.
가문 중의 유약이 공자와 매우 많이 닮았으므로 그를 후계자로 모셨다. 그리고는 공자에게 대했을 때와 같은 태도로 그에게 가르침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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