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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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보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아무리 유명인이나 공인의 발언이라고 해도 혐오나 차별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그대로 인용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 유명인이나 공인이 아닌 사람들의 발언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양궁 선수 안산의 숏컷 페미니즘 언급은 혐오와 차별에 해당했다. 하지만 각 매체는 이런 성평등 보도 가이드라인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을 아주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그대로 보도했다. 마치 뭔가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처럼 갈등은 물론 논쟁이 대등하게 벌어진 듯 다뤘지만, 만들어진 세계였다.

본래 숏컷 페미니즘에 관한 언급은 거의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확대 증폭한 것은 언론매체였다. 이 같은 글은 매체에 보도되면서 이른바 루핑 효과(Looping effect)를 낳았다. 루핑 효과는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한 정보나 사실이 언론 매체를 통해 확대 증폭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렇게 안산 숏컷 페미니즘이 불거지자 이른바 좌표 찍기가 안산 선수에게 이뤄졌다. 여대를 다닌다는 사실이 부각됐고, 심지어 과거의 발언까지 조사돼 공유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본격적으로 여성 혐오를 일삼는 이들이 안산에게 몰려들었다. 더욱 더 혐오와 차별의 발언이 가해졌다. 이렇게 되면서 안산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아가 정치권에서도 발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피니언 리더에 해당하는 유명인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관련 기사들은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왔다. 언론매체만이 아니라 모든 방송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마침내 외신들도 안산 선수를 둘러싼 현상을 다뤘고 이를 온라인 학대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안산 선수에게는 엄청난 혐오와 차별 발언이 쏟아졌는데, 이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의식 있는 정치인과 단체, 인사들로 인해 선명성이 부각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잘 뵈지 않는 게시판에 있던 글을 언론매체가 확대 증폭시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준엄하게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지 모른다. 혐오와 차별을 증폭시키는 매체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혐오 차별의 발언을 하는 이들을 거대하게 실체화하는 것이 더 유리해 보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론 때문이라고 하면, 자신의 의식성과 선명성이 덜해질 수 있다.

BBC 서울 기자 로라 비커는 정확하게 말했다. 숏컷 페미니즘의 관점을 가진 이들은 소수라고. 그런데 소수인 숏컷 페미니즘 프레임을 만든 이들은 쾌재를 부른다. 그들은 익명성 속에서 함부로 혐오나 차별의 발언을 하고 그에 따라 세상이 들썩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털을 포함해서 많은 콘텐츠 플랫폼도 웃었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페이지뷰를 기록해줬기 때문에 광고 수익을 포함해서 많은 이득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평소 젠더 이슈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의식 있는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혐오와 차별 발언은 매체를 장식할 것이고 앞에서 묘사한 상황들은 반복될 것이다. 매번 혐오와 차별의 담론이 줄어들지 않는 것은 이렇게 혐오와 차별적 텍스트를 일탈 증폭시키는 매체들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뉴스는 가짜 뉴스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 팩트체크라는 것도 그런 면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혐오 차별의 발언이 인터넷에는 분명하게 있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수 담론을 오히려 그것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하는 행위가 더 위험하다. 오히려 모르는 이들도 그러한 혐오 차별 병리의 담론에 감염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을 방조하면서 자신들의 선의지와 진일보함을 부각하는 각각의 선택들이 오늘도 혐오와 차별을 널리 확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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